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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Aug 16. 2019

좋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악성 재고의 아이콘이 사용자를 이해하기까지

1년간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내가 다시 일하게 된 곳은 판교에 위치한 한 IT기업이었다. 나는 캐릭터 사업을 위해 새롭게 꾸려진 팀에서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사용자에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다. 실제로 제품을 만들거나 다른 브랜드와 콜라보를 하거나 팝업 스토어를 열거나 하면서 파트에 대한 구분 없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업을 본격화한다는 목적으로 우리 팀은 분사를 하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자이너가 3명뿐인 작은 조직이었다.


우리는 스타트업일까?

함께 분사해서 나온 동료들끼리 가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스타트업이야 뭐야? 대놓고 스타트업이라기엔 정체성이 모호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스타트업처럼 일했다. 분사 초기에는 적자였으나 우리 애들(캐릭터들)을 성장시켜 어떤 영향력을 만들어 보자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다 같이 으쌰 으쌰 할 수 있었다.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 일당백을 해내야 했고, 대표는 우리를 달리는 기차에 탄 것으로 비유하곤 했다.

“우리는 달리는 기차에 있는 것 같아. 기차를 세우고 수리하면 좋겠지만 달리면서 바퀴도 갈아 끼우고 엔진도 교체해야 하니 힘들 수밖에.”

와 닿는 말이었지만 잠깐만 기차를 세웠으면 싶을 때가 많았다. 세워놓고 완벽히 정비하면 더 빠르게 잘 달릴 것 같은데요.. 스타트업은 성장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디자이너가 매출까지 신경 써야 하나요?”

비즈니스 감각이 없었다고는 해도 입사 초기에 나는 이런 개념 없는 질문을 던져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핑계가 되려나. 하지만 무식한 만큼 파워 당당했기 때문인지 사업 팀장님은 “그 부분은 우리가 더 신경 쓰겠다..”고 했다. 그분을 만나게 된다면 꼭 사과하고 싶다.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닌데.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체계가 잡히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일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 3명이서 제품, 공간, 라이선스 등등을 다 커버했으니 말 다했지. 제품의 그래픽과 패키지를 주로 담당했던 내가 자연스럽게 라이선스까지도 맡게 됐는데, 라이선스 사업도 막 시작되던 무렵이라 실은 PB와 라이선스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했다.


간단히 정리해봤는데 아닐 수도 있음 ^^


PB도 그렇지만 라이선스 제품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려웠다. 몇 번의 피드백이 오가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라이선시 업체들에게 원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디자인을 다 다시 해서 보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몰라서 용감하게 한 일들이 어찌나 많은지. 칫솔, 치약부터 텀블러, 피크닉 매트까지 생활 속에서 필요한 온갖 제품을 그렇게 만들었다. 많은 파트너들이 캐릭터를 최대한 크게 최대한 많이 사용하기를 원했고, 나는 브랜드를 잘 담아내기 위해서는 브랜드 컬러 위에 캐릭터는 위트 있게 포인트로 딱! 절제된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열을 내며 커뮤니케이션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측불가.

당시 내가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장인의 팔찌는 꽤 만족스러운 패키지로 출시되어 내부에서는 반응이 좋았으나 기대만큼 잘 팔리지 않았다.

캐릭터 원형을 재현하기 어려운 품목이라 매력이 부족했나?

유통이 자유롭지 않아서 판매처의 접근성이 떨어졌나?

아니면 부담스러운 가격 때문에?

근데 이 팔찌 왜 만든 거지..?

후에 입사한 한 MD가 그랬다. 이 속도로는 80년을 더 팔아도 남을 거라고.


내가 악성 재고의 아이콘이 되다니..!


만족스럽다 생각한 제품은 안 팔려서 악성 재고로 남기도 했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기 부끄럽다 생각한 제품은 팔리고 또 팔려서 수십 번씩 재 오더 되기도 했다.

다양한 상황과 이유가 있었겠지만 캐릭터 제품이라는 특징도 한몫했을 거다.

그 당시 내 주변에 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내 친구, 아는 형님, 우리 아빠 등)의 차에는 대다수 피규어형 방향제가 꽂혀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이전에도 차량용 방향제를 사용했었는지, 왜 이걸 샀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향이 다 날아갔는데 아직까지 꽂혀 있는 경우도 있다.


왜? 그냥 귀엽잖아


생각보다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때의 충격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디자인에 대한 어떤 편견을 깨 주었다. 사람들은 단지 캐릭터를 둘렀다는 이유로 자기가 쓰던 샴푸를 바꾸지는 않지만, 캐릭터 제품이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방향제를 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에 앞서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조금씩 깨달았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일부 중의 일부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가졌던 불만들이 회사의 생존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좋은 디자인이 곧 좋은 매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매출에 도움이 안된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디자인일까.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껴주는 ‘사람’이 없다면 정말 아름다운 것일까.

반대로 잘 팔리기만 하면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출이라는 것은 성장(=생존)을 위한 매우 중요한 지표지만, 매출만을 생각한다면 브랜드가 될 수도 없고, 결국 수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에만 신경 쓰다가 망해버리면 그건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의미 있는 매출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브랜드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브랜드 매니저로서 진작 했어야 할 고민을 뒤늦게 시작하면서 나는 이 일을 좀 더 제대로,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고, 작은 POP 하나를 구상하면서도 어떤 말을 어떻게 던져야 사람들이 웃겨할까, 재미있어할까, 사용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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