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제주이민을 선택하다

by 자유지은



내 고향은 서울이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적을 둔 친척도 없 다. 그래서 민족대이동이 벌어지는 명절연휴에도 내려갈 시골집이 없어 서울에서만 연휴를 보내곤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 이 서울 토박이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대학을 졸업 한 후에도 당연히 서울에서 일했다. 나에게 서울은 ‘당연히 내가 살 아야 할 곳’이었다. 한 번도 서울을 떠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 다. 그런 내가 지금은 제주 이민 4년차가 되어, 이곳 제주에 살고 있다.


제주 이민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제주에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서 강릉 경포대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오르곤 했다. 방송작가를 하면서 여행코너를 맡았을 때는 촬영지를 바다나 섬으로 잡아서 일부러 현장까지 따라갔다. 일이 고단해도 그저 넓고 푸르고 청량한 바다를 보면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렇지만 방송작가는 직업 특성상 워커홀릭이 되어야만 살아남 을 수 있다. 요즘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게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방송작가에겐 주말이 따로 없다. 녹화 끝나면 자막 뽑기 전까지 가편 기다리는 시간이 잠깐 여유로울 뿐, 그마저도 다음 주 방송 때문에 회 의하고, 구성안을 쓰고, 섭외해야 한다. TV는 쉬는 시간도 빨간 날도 없이 틀면 언제든지 나온다. 결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하늘이 무너지고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내가 만드는 방송은 반드시 정해진 요일, 바로 그 시간에 전파를 타야한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아니 대부분이 동감할 것이다.


방송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삼천포로 너무 오래 빠졌다. 여하튼 그렇 게 치열하게 살다보니 나도 후배들한테 ‘언니’ 소리 듣는 연차가 되 었는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생활에 과로가 겹쳐 입원 까지 했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스트레스와 과로를 조심하지 않으면 더 큰 병이 올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신경이 쓰였다. 딱히 오래 살 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병원에 누워 있다 보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일단 여행 갈 짐부터 쌌다. 새벽에 티켓을 끊고 바로 아침 비행기로 갈 수 있는 곳! 나는 그냥 즉 흥적으로 혼자서 제주여행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 혼자서 제 주여행을 한다는 건 생소하고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나는 겁도 없었 다. 죽다 살아났으니 두려울 게 없다는 듯 혼자서 제주도를 누비고, 심지어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히치 하이킹을 해서 모르는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요즘 은 하도 무서운 뉴스가 많아서인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 지만, 그때는 좀 달랐다. 세상을 너무 해맑게만 봐서 그랬을 수도 있 겠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한마디로 ‘겁대가리 상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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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난 혼자만의 제주여행은 내게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 겼고, 지쳐있던 내 영혼을 뜨겁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아 쉬움과 미련을 남겼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 똑같이 일을 하고 예전처럼 살다가도 틈만 나면 제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런데 계 속 와도 돌아갈 땐 항상 미련이 남고,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아…….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


내 마음에 작은 욕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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