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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May 19. 2024

업무 정의에 열려있어야 할 이유

유동적인 세계

얼마 전 한 고민글을 읽었다. '새로운 동료와 조직이 서로 업무를 다르게 정의해 의견이 충돌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까?'라는 고민이었다. 머릿속에 상황이 자연스레 펼쳐지고, 작성자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져서 갑갑한 마음도 들었다. 황희 정승 같은 생각이지만 이건 누구 잘못도 아니고, 말 그대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입장차를 좁혀야 할 일이다 싶었다. 아울러 '그 직무가 고정된 일이 아니고, 업계와 조직 변화에 따라 직무 성격과 역할도 유동적이라 이런 충돌이 불가피하다'라고 생각했다.

'테크니컬 라이터'를 광범위하게 설명하면 '기술 문서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테크니컬 커뮤니케이터'라는 이름으로 역할을 확장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런 정체성을 품고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이란 소통 수단이니까. 엔지니어끼리든, 조직과 고객끼리든 제품을, 기능을 원활히 이용하려면 정보를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가공하고, 전달해야 하니 이건 소통의 영역이다. 세부 업무를 살펴보면 글만 쓰지도 않고, 기술 문서를 매개로 조직 안팎과 소통하는 업무 비중도 크다.

기술 문서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역할 안에는 굉장히 다양하고 세부적인 업무가 있다. 일례로 문서를 작성하려면 기획해야 하는데 광범위한 조사,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 등 절차가 필요하다.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도 꾸준히 관심 갖고 파악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기술 문서를 라이터 혼자서 쓰는 건 아니다. 엔지니어들이 먼저 쓰고, 이후 라이터가 리뷰, 수정하며 함께 완성하기도 하고. 콘텐츠 성격에 따라 라이터 손을 타지 않는 문서도 있다. 이런 상황도 유동적이다 보니 역할이 가변적이고, 무 자르듯 정의해 말하기 어렵다 싶다.

기술 문서 범위도 폭넓다. API 문서, 리드미, 릴리즈 노트, 가이드 등을 먼저 생각하는데 기술블로그, e-book, 백서, 제품 페이지 등 조직에서 기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생산하는 거의 모든 문서를 기술 문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면 기술 정보를 전달하는 고객사례나 뉴스레터, 보도자료, 이메일, SNS까지 여기에 포함될 수도 있다. 모든 직원이 테크니컬 라이팅을 수행하고. 또 테크니컬 라이팅이란 행위를 놓고 보면 주석을 쓰는 것도 같이 언급한다. 모든 테크니컬 라이터가 위에서 말한 모든 문서를 다 작성하고 관리하는 건 아니다.

조직마다 테크니컬 라이팅 업무 수요가 다르고, 그 수요도 그때그때 바뀐다. 조직마다 테크니컬 라이팅 업무 이해도 다르다. 따라서 '이 업무는 무엇이다', '그 작업은 이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만약 자신이 기존에 수행한 업무, 또는 자신이 기존에 정의한 업무와 다른 일을 조직에서 요구하면 조직 구성원으로서 '맞춰가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는 한다. 조율할 수 없는 일이라면 선을 분명히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서로 한 배를 타기 전에 서로 업무 정의, 직무 정의를 먼저 조율하고, 동기화하면 더 좋고.

아울러 이 직무는 해외에서는 많고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직무였다가 최근 몇 년 새 관심이 높아지고, 조직에서도 업무 수요를 느끼며, 채용 수요가 늘었는데- 그렇다 보니 직무 이해가 저마다 다르다 싶기도 하다. 테크니컬 라이터를 생각했을 때 A 역할을 많이 떠올리지만, 조직에 따라 B, C, D 역할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때도 있고. 기술 문서를 넘어 폭넓게 콘텐츠 매니저 또는 콘텐츠 마케터 역할을 기대할 때도 있다. 이밖에 다른 역할을 요구하는 곳도 있을지 모른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콘텐츠를 자동 생산하는 시대에 이 직무의 유효 기한을 두고 여러 전망이 엇갈린다. 최첨단 기술이 숨 쉬듯 나와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걸 볼 때마다 위협을 느끼다가 그게 일상이 되니 위협도 만성적으로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일상적인 분단 또는 휴전 상황처럼.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벅차고 급하며, 이를 잘 진행하는 것도 성장과 발전에 시급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란 생각에 일단 그 일부터 성실히 수행하려고 한다.

다만 조직과 업계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직무, 업무 요구사항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싶다.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도전적인 상황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중에서도 잘하는 일을 살릴 수만 없고, 그건 스스로 매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할을 고정해서 생각하기보다 역할이 언제든 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 조직의 일이니까. 나는 조직의 일을 대신하는 거니까. 주인의식과 주인을 혼동해선 안 되는데 이게 역할 정의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초연하게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닐 듯하다. 그래서 복합적인 심경이 들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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