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도착한 날은 기절하듯 신생아 수준으로 잠들었다. 꼬박 밤을 새고, 반나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깨어 있었으니. 이틀 연속 잠을 안 잔 셈이다. 한국과 영국 시차는 8시간이라서 완전 반대라고 하기 그렇다. 영국이 오전 6시일 때 한국은 오후 2시. 활동시간이 어느 정도 겹쳐서 시차를 적응하려면 할 수도, 못하면 못할 수도 있다.
평소 난 한국 시간으로 늦은 오후에 BBC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한다. 여기 하루가 저물어갈 때 거긴 하루가 시작된다. 새롭게 하루를 열 때 뿜어나오는 특유의 에너지가 좋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조간 뉴스가 바쁘게 흘러나오는 풍경. 특히 일요일에 그걸 느끼면 주말이 더 길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괜찮았다. 일요일 저녁에 라디오로 스튜디오 라이브 공연을 듣는 것도 좋다.
세인즈베리의 셀프 계산대. 사진=딱정벌레
아침을 먹고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눈알을 굴리며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며 걷다가 어떤 남자와 부딪혔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주위를 잘 살피며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외사촌 동생과 나갈 준비를 마치고 밖을 나섰다. 첫 코스는 로얄 알버트 홀. 우리가 지냈던 얼스코트는 위치가 좋았다, 왠만한 관광지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로얄 알버트 홀도, 하이드 파크도.
외사촌 동생이 살 게 있어서 마트에 잠시 들렀다가 로얄 알버트 홀로 걸어갔다. 이 동네는 셀프 계산대가 보편화됐다. 우리나라도 최근 몇년 새 셀프 계산대가 늘었지만 마트에서는 그래도 사람 계산원 역할이 크다. 런던에서는 마트든, 슈퍼마켓이든 사람 계산원보다 셀프 계산대 비중이 더 커보였다. 로얄 알버트 홀까지 걸어가는 데 20분 걸렸다. 밥먹고 산책하기 좋은 수준. 길가에서 라임의 전기자전거를 발견했다. 당시 영국에서 전동킥보드 이용이 제한돼 있다보니 라임도 현지에서 전동킥보드가 아닌 전기자전거 서비스를 운영했다.
로얄 알버트 홀 입구. 사진=딱정벌레
로얄 알버트 홀은 공사 중이었다. 공연은 그대로 진행하고 있지만 겉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건너편에는 영국 왕립 음악학교가 있었고. 로얄 알버트 홀에 들어가려면 가방을 검사받아야 하고, 음료수를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물은 예외였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방 안을 보여주려고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이것저것 내려놓다가 우당탕 소리가 났다. 가방 검사를 하는 흑인 관리인이 날보고 미소지으며 "Gently"라고 말했다.
로얄 알버트 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난 학창시절부터 오아시스를 좋아했고, 내 최애 멤버는 노엘 갤러거였다. 그의 거친 말버릇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만든 노래는 좋았다(그가 블러의 데이먼 알반과 알렉스 제임스에게 "에이즈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끔찍했다, 본인도 그 말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정정했지만). 기억에 남는 오아시스 공연이 많은데 1995년이었나 로얄 알버트 홀 공연이 그랬다.
로얄 알버트 홀 공연 안내 화면. 사진=딱정벌레
당시 공연에는 리암 갤러거는 나오지 않았고 노엘 갤러거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오아시스 라이브 공연 부틀렉 파일을 내려받아 들었다. 로얄 알버트 홀 공연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들은 곡 중 'Cast No Shadow', 'Talk Tonight'이 좋았다. 캐스트 노 섀도의 후렴구 가사가 'As they took his soul they stole his pride'인데 오아시스는 공연에서 'You can take my soul, don't take my pride'라고 바꿔부르곤 했다.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노엘도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로얄 알버트 홀을 동경했고, 꼭 가보고 싶었다. 이번에 여행갈 때도 가려고 점찍어두기도 했고. 현지에서 어렵지 않게, 너무도 쉽게(?) 와서 신기했다. 공연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은 따로 있었다. 우린 그냥 매표소 주변만 구경했다. 공연장 안은 넓겠지만 매표소 주변은 좁았다. 기념품 가게가 같이 있었고. 화면에는 공연 일정 안내가 나오고. 로얄 알버트 홀은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알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는데 연혁을 읽어보니 여왕의 찐사랑이 느껴져 인상깊었다.
로얄 알버트 홀 매표소와 기념품 가게. 사진=딱정벌레
로얄 알버트 홀을 빙 둘러보니 몇개월 전 있었던 BBC Prom 일정이 나와있고. 늘 라디오로만 듣던 공연이라 실제 여기와서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구경만 했지만 다음에는 공연을 보길(그러고보니 공연의 도시에 와서 뮤지컬조차 한 편도 안 봤네. 영국은 볼 게 많다. 근데 난 뮤지컬보다 내가 좋아하는 현지 대중음악 가수 공연을 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테이크 댓 공연을 보고 싶다. 2009년 웸블리 공연 영상을 인상깊게 봐서. 특히 'Greatest Day', 'Rule The World'를 꼭 라이브로 듣고 싶다).
하이드 파크는 로얄 알버트 홀에서 길 건너면 바로 있었다. 런던의 가을을 완연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곳. 하이드 파크도 공연 실황으로 주로 접했던 곳이라 늘 가고 싶었다. 영국 왠만한 뮤지션은 다 여기서 공연했으니까. 내 기억에 남는 건 블러, 더후의 공연이었다. 이제 할아버지가 된 더후 멤버들이 힘차게 'Baba o'riley'를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로저 달트리의 굵고 에너지 넘치는 보컬도 좋았고, 피트 타운젠트의 열정적인 기타 연주도 좋았다. 팔이 춤추는 느낌으로 드럼을 치던 키스 문은 없지만.
하이드 파크를 거닐며 찍은 영상. 촬영=딱정벌레
더후가 'My Generation'에서 들려주던 특유의 반항기, 젊은 날의 치기가 학창시절 마음에 와닿았다. 탈선 욕구(?)는 있어도 그럴 용기는 없다보니 그나마 센(?) 음악을 즐겨듣는 걸로 내 치기를 발산했던 시절. 웃긴 생각이지만 센 음악을 들으며 내가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중학교 때부터 록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나마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좀 부드러운(?) 음악도 들은 것 같다. 그 전에는 멜로디가 강한 음악도, 대중성이 강한 음악도 나약하게 들려서 그걸 듣는 걸 대놓고 드러내기 꺼렸다. 중2병이 이렇다.
하이드 파크는 무진장 넓었다. 거길 다 둘러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 다음에 모노클 숍에 가려고 해서 그쪽 방향으로 공원을 걷고 걸었다. 중간에 어떤 다리도 건넜고.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셨다. 다리 난간에 음료를 올리고 사진도 찍었는데 그날 런던 구름이, 하늘이 참 멋졌다. 플리커에 이 사진을 올렸더니 반응도 좋았다. 이 사진은 지금 내 휴대전화 바탕화면 홈화면을 장식하고 있다(잠금화면은 옥스퍼드 카펙스 타워에서 내려다 본 전경 사진을 쓰고 있다). 그날은 바람도 적당히 불고, 날이 참 좋아서 카메라로 영상도 열심히 찍었다. 하이드 파크는 걷기만 해도 너무 좋았다. 밤엔 위험할 수 있지만.
하이드 파크 어느 다리서 찍은 전경. 사진=딱정벌레
우리나라는 반려동물을 끌고 산책 나오면 목줄을 찬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원에서도 그걸 독려하고 있고. 근데 영국에선 그렇지 않았다. 애들이 마구 뛰어다닌다. 개가 아무리 커도 목줄 안 채우고 야생마 마냥 달리고 있다. 난 개를 무서워해서 좀 긴장했다. 에든버러에 갔을 때도 산에 올라가는데 역시나 사람들이 개를 묶지 않은 채 올라왔다. 그러다 마주치면 난 대놓고 꺼리는 티를 냈는데. 맞은 편 사람이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이런 말을 했다. 큰 위로는 되지 않았지만.
산책하듯 공원을 걷다가 모노클 숍 가는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모노클은 팟캐스트도 만들고 자신들만의 라디오 채널도 운영하지만 온라인에 콘텐츠를 노출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쇄매체 한 길만 파고드는. 모노클 정도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라면 그래도 될 듯하다. 우리나라서 콘텐츠 사업하는 이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데 나도 매거진 B에서 모노클 특집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 인쇄매체 만들거면, 애드버토리얼을 만들거면 저정도는 돼야지.
모노클 숍 내부. 사진=딱정벌레
모노클이 오프라인 매장도 여럿 운영한다고 해서 궁금했던터라 이번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면서 독자와 만나는 걸까. '퇴사 준비생의 런던'에서 자세히 다루긴 했다만. 모노클 매장이 여러군데 있는데 카페도 있고, 일반 매장도 있다. 우리가 간 곳은 책과 굿즈를 파는 일반 매장이었다. 카페와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따로 있었다. 카페도 머잖은 곳에 있었는데 가보지 않은 게 약간 아쉽다.
아무튼 매장은 생각보다 엄청 작고 좁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 간판에 '모노클'이라고 쓰여있는데도 맞나 싶어서 "여기 모노클숍 맞아요?"라고 묻고 들어갔다. 매장이 작아서 왠지 여기에 오래있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직원 혼자 있고 그는 친절했지만 오래 있으면 그의 자유로운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 적당히 둘러보고 나오려고 했다. 그때 직원이 우리에게 '앙트프리너'라는 새 간행물을 소개했다. 마침 그때 이 간행물의 첫호가 나온 터였다.
모노클의 '앙트프리너' 1호. 사진=딱정벌레
앙트프리너는 비즈니스 매거진인데 모노클의 동명 팟캐스트 '앙트프리너'에서 나왔다. 최근에 '듣똑라'에서 오디오 콘텐츠를 아티클로 내고 이걸 유료로 운영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것과 같지 않지만 조금 닮은 듯하다(개인적으로 기성 언론의 뉴미디어 실험 중에서 듣똑라가 돋보인다. 폴인도 괜찮지만 오프라인 스터디를 제외하면 퍼블리나 북저널리즘 등 비슷한 모델이 이미 시장에 많은 듯하다. 어떤 경우는 필진도 겹치고. 아무튼 듣똑라는 오디오 콘텐츠지만 비디오, 텍스트로 입지를 넓히고 있고, 라디오 제작자도 많이 주목하는 듯하다).
앙트프리너 내용은 흥미로웠다. 업계 리더 인터뷰는 물론 비즈니스 스쿨 방문기도 있고. 사업 아이디어, 영감을 얻거나, 창업하거나, 사업을 확장하려는 사람이 보면 좋다고 소개됐다. 가격은 10파운드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1만5000원 정도? 모노클보다 가격은 더 나간다. 앙트프리너는 벤처뿐만 아니라 기업 규모나 사업종류에 상관없이 기업가라면 누구나 두루 볼만한 내용을 다뤘다. IT 기반 사업을 하지 않는 스타트업, 기업가도 도움될만한 내용. 콘텐츠 서비스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모노클보다 앙트프리너를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BBC 정문. 사진=딱정벌레
모노클숍에서는 정기간행물 외에도 옷, 컵, 가방, 파우치, 노트 등도 팔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모노클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좋은 디퓨저 향이 났다. 직원에게 매장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흔쾌히 받아줘서 영상과 사진을 촬영했다. 직원은 친절했다. 앙트프리너를 사려고 결제하고 나니 내게 "짐이 많아보인다"며 가방 하나 줄지 물어봐줬다. 난 내 보조가방을 가리키며 "괜찮다"고 답했지만. '미디어 브랜드를 공간으로 형성화하면 이렇구나'라고 느끼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여기서는 BBC도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동네 산책하듯 관광하는 기분 좋다. 때는 점심시간이라서 먹을 거 사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외국에서는 가벼운 샌드위치 사서 각자 자리에 앉아 알아서 점심먹는 분위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만. 점심은 든든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저걸로 요기가 될까 싶기도 한데. 여행가서는 그런 사소한 광경도 다 재밌다.
BBC Broadcasting House. 사진=딱정벌레
BBC Broadcasting House는 회색에 고층은 아니었고 타원형으로 넓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숍이 있다고 들어서 그거나 볼까 했다. 근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담배 피우고 있는 어느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손가락으로 어디를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찾기 어려웠다. 건물 안에 들어가봤더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미팅있냐"며 그게 아니면 나가달라고 했다. 보안에 굉장히 신경쓰는 느낌이었다. "숍에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없어졌다고 했는데 그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BBC 정문 근처에는 조지 오웰 동상이 있었다. 동상 옆에는 그의 어록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자유가 뭔가를 뜻한다면 그건 사람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걸 말할 권리를 뜻한다(If liberty means anything at all, it means the right to tell people what they do not want to hear)".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에 대한 내 생각도 달라졌다.
BBC 조지 오웰 동상. 사진=딱정벌레
처음 그 문구를 봤을 때 그건 공영방송, 기성언론의 지적 오만일 수 있다고 봤다. 언론사가 '사람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걸 말할 자유'를 판단할 때, 계몽자 입장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그걸 정한다고 판단했으니까. 오히려 언론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 궁금해하는 것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달라졌다. 그건 사람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건 아니겠지만 듣기 불편한 진실이긴 하다. 그걸 밝히는 자유는 무척 소중하고.
표현을 바꾸면 '자유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할 권리'가 아닐까. 저널리즘 가치는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겠다'라는 이기적이고 끝없는 욕망을 부채질해선 안 되고. 사람은 없고 욕망만 있는 저널리즘을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저널리즘 가치를 훼손하는 직업인은 아니었나. 모두를 위하긴 어려워도 특정 집단의 나팔수가 돼선 안 되고. 돌아보면 부끄럽다. 조지 오웰 어록은 처음 봤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불과 반나절 일상만 적었는데도 벌써 분량이 이 정도고. 나머지 반나절 런던 여행 이야기는 다음 글에 써야겠다. 맨체스터, 세븐시스터즈, 런던 여행 1일차 이야기 모두 글 한편에 담았는데 너무 길고. 이런저런 상념 곁들이다보면 글 하나에 다 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여행 기분 다시 만끽하려고 오늘은 에드 시런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공연 실황을 들으며 글을 썼다. 다음에는 어니스트 버거에서 먹은 햄버거 이야기와 러시, 부츠, 무지,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 애비로드, 해롯 백화점, 타워브릿지 방문기를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