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교수님의 특강을 듣고
2022년 10월 7일 제주의 '원명사'에서 사회과 선생님들, 교육과정 공동체 모임 선생님들과 그리고 고등학교 사회과 동아리들 학생들이 참여한 '조한혜정 교수님'과의 특강을 다녀오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견딤'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눈 후, '파상력'을 필두로 이 사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디며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을 전해 들으며 나 혼자만의 고민과 아픔들은 결국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다 같이 나눌수록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고등학생들은 주로 학업과 잠, 부모님과의 갈등 문제들을 이야기하였다.
젊은 교사들은 육아 등의 가정문제와 학교에서의 수업, 교육적 고민, 동료 교사들과의 문제들을 주로 얘기하였다.
망각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결국 슬픔과 후회,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에 우리는 '시간이 약이다'라고 하며 지금을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견딤'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생각하고 내가 해야 할 의무라고 받아들이고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시선들에 맞추어 살아가면 결국 과부하가 일어나 스스로 무너져버릴 것이다. 온갖 바람을 맞아도 흔들리면서 그 바람을 흘려보내주는 '갈대'처럼 견딤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보내야 견디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견딘다는 것은 어떤 문제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부여잡고 계속 매달리며 그 문제들이 스스로 없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단어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기에 일단 견디는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일단 성실하게 꿋꿋하게 견디다 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하지만 밝은 대낮의 골목길은 안 무섭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의 골목길은 두려운 것처럼 실체가 불분명하면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렇다. 문제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그것을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골목길일 뿐이다.
학생들의 견딤의 대상이었던 '학업, '진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공부를 하는가?
점수나 등급이 떨어지면 왜 두려운가?
어쩌면 10년 뒤의 내가 그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두려워했었다면 실소를 했을지도 모른다.
막연한 두려움도 구체화시킨다면(대학이라는 막연함을 굳이 왜 그 대학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답을 구해보자. 그러면 꼭 그 대학이 나의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회피할 수 있거나 견딜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 도전해 볼 수 있고 견딜 수 있을 긍정적 걱정으로 격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해라.
머릿속에 손쉽게 자리 잡은 가치관 등에 대해서 다시 의심해 보자. 그래서 삶의 지표와 가치관 등을 재정립하고 재정의 해야 한다. 즉 누군가의 강요로 주입된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님들, 선배들에 의해 만들어진 구시대의 유물을 벗고 우리끼리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조심하자. 즉, 이게 교육이고 올바른 삶의 방향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그것도 결국 고인 물이 되고 이내 후배 교사들 혹은 더 진보한 교육관을 가진 동료교사들과의 갈등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삶의 방향과 여정이 다르 듯 사람들마다 그 정의와 속성도 다르기에 다른 이의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말자. sns의 화려한 게시물들이 전부가 아니 듯이, 남들과 경쟁하는 상대평가가 아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자기만의 절대평가를 치르며 나만의 방향과 속도를 정하자. 그러면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혹여 바람이 안 불어도 우리 스스로는 움직이고 있기에 바람개비는 잘 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