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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Oct 25. 2023

무능하기에 받을 수 있는 사랑

12화.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

생애초기, 사랑으로 완전해지는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한다. 부모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기를 먹여주고 씻겨주고 안아준다. 따뜻한 눈빛과 세심한 손길로 울면 달래주고 불편한 데가 있으면 해결해 준다. 한 번 웃기라도 하면 훨씬 더 큰 미소로 (때때로 환호가) 돌아온다. 이 시기에 받는 사랑과 돌봄은 특별하다. 점차 커가면서 성적을 잘 받아야지만, 어른들 말씀을 잘 들어야지만, 성과를 내야지만 받는 조건부 사랑과는 다르게 오히려 무능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받는 이해와 돌봄과 관심이다. 약하고 여린 존재에게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마음이며 정성이다. 아기는 그 자체로 사랑받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생애초기에 받는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면에 차곡차곡 채워져 살아가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는 강력한 믿음으로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체험과 믿음은 살아가는 내내 인간을 서 있게 하고 걷게 하는 뿌리가 된다. 때로는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힘의 근원이며 삶의 배경처럼 작용한다. 험난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기억도 못하는 시절에 받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조금 의아하기도 하다. 요즘에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나를 믿어줘야 한다.'와 같은 말들이 쏟아지지 않는가. 그런데 이게 어렵지 않게 가능하려면 적어도 단 한 번은 타인으로부터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혼자서는 어렵다는 것. 이 것은 우리가 '사람사이'에서 태어났고, '사람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가성비 좋은(?) 시기가 바로 갓 태어나 세상에 적응하는 시기이다. 텅 비어있던 주머니가 성인이 돼서 갑자기 쏟아붓는다고 해서 쉽게 채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관적이고 안전하고 따뜻한 사랑

무의식에 새겨지는 무적의 경험


심리학 연구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존 볼비(John Bowlby)는 영유아기에 주양육자로부터 받는 안정된 돌봄과 그 사이에서 형성된 애착이 심리적, 사회적 발달에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애착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그것이다. 이때에 안정애착을 형성한 유아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 여기고 주변환경 또한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여긴다. 나와 세상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갖춘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과제와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시련이나 상처에서 회복하는 회복탄력성도 높은 편이다. 그야말로 심리적 금수저가 된다고나 할까.


마찬가지로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0~6개월 시기를 절대적 의존기라고 하며 이때에 엄마가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아이는 전능감을 경험한다고 본다. 엄마를 통해 욕구가 충족되고 정서적으로 채워지는 데 이 것이 그 이후의 정서발달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전능감을 느끼는 것이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가득 채워보는 것처럼 마음을 가득 채워보는 경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 경험을 주는 대상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아빠의 육아참여도가 높아 아빠와 정서적 친밀도가 높은 경우도 많고, 조부모나 기관에서 더 오랜 시간 맡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중요한 건 일관적이고 안전하고 따뜻한 사랑이다. 이를 통해 완전해지는 경험은 어린아이에게 핵심적인 경험이 된다. 무적이 되어보는 경험.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오롯이 체험하는 시간. 수많은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료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공허감을 느낄 때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당장 나를 물리적으로 괴롭게 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 느낌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 것인지 알게 된다.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아무리 먹고 마시고 돈을 써봐도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득 채워져 본 경험이 무의식 속에 있으면 그것을 발판 삼아 다시 자신을 건강하게 일으키고 채워갈 힘이 생기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냥 사랑으로는 안돼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사실 어려운 이론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린 시절의 치명적인 결핍이나 상처가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는 것쯤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어렸을 때 겪었던 가난에 대한 기억이나, 부모로부터 상처받았던 경험, 형제자매 사이에서 서러웠던 기억 등은 세월이 흘러도 씻기지 않고 여전히 어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곤 한다. 인간은 기억을 가진 존재, 때로는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 위의 기억이든, 의식 아래의 기억이든 강렬한 경험들은 계속해서 살아서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에 온 마을 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에게는 관심과 사랑이 많이 필요하고, 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때이기도 하다는 뜻처럼 해석된다. 엄마, 아빠 등 가장 중요한 타인을 통해 사랑으로 완전히 채워지는 경험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녹록지 않은 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나 요즘의 험난하고 거친 세상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단단한 뿌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그런데 이렇게 생애초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가다 보면 엄마들의 마음은 위축된다. 나는 살림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는데... 아니, 나 자신을 사랑하기에도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거대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존 볼비 아저씨도, 도널드 위니컷 아저씨도 (물론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어렵게 연구하고 관찰해서 정리한 이론이겠지만 그들도 '엄마'여 본 적은 없지 않은가?!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한 사람일 뿐인 여자들에게는 애착이론을 포함한 어린 시절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족한 엄마가 어떻게 아이에게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다음 내용이 13화에 이어집니다)



12화 끝.





집에 안가겠다고 식탁밑에 숨어버린 두녀석들 (딸과 딸의 친구)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은 '사랑'에 대해서 나눠봤습니다. 이 주제는 언제나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할 말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이전에 작성했던 글을 퇴고해서 올리는 데 자꾸만 말을 덧붙이게 되어 길어지는 것 같아 상/하로 나누어 올리게 되었어요. 상담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높은 확률로)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사례가 많은데요, 어린 날에 아물지 않은 상처,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내면에 살아있습니다. 관심을 달라고 안아달라고 메세지를 보내는데 일상에서는 그게 방해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꾸 걸려 넘어지게 되니까요. 참 신기하죠..그런데 오늘의 글이 '나는 어린시절에 저런 사랑을 못받아서 사는게 힘든거구나!' 라는 단순한 결론과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결론지을까봐 염려도 됩니다. 그러니 다음주에 연재될 글도 꼭 읽어주세요. 언제나 건강 잘 챙기시고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아닌 말로도 나눠요 - 유튜브 채널 소개


1. 김혜령 작가의 채널 [마음의 집]

https://www.youtube.com/@user-hx4mr8qk3s/featured



2. 심리, 명상채널 [마음숨]


마인드트립 이현정 대표님과 마음숨 선생님과 함께 마음과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음여행자'의 대화를 기록합니다.


https://www.youtube.com/@heartsum/vid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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