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좋은 엄마'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초등학생 딸아이를 둔 친구가 아이의 숙제장에서 '엄마는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집에서는 무서운 사람이에요. 항상 화가 나 있어요'라고 쓴 것을 보고 놀랐단다. 그 글에서 거짓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놀랐고, 아이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번 더 놀랐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 아이는 아주 투명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내 아이에게 마냥 친절하기가 가장 어렵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하지만, '좋은 엄마'를 완성시키는 건 아이의 시선이기도 하다. 나 혼자 '나는 좋은 엄마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아이의 눈은 너무나 정직하고, 아이 앞에서 가면을 쓰기란 참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나의 못난 모습, 나 조차도 싫어하는 내 모습을 자주 들켜버리는 게 현실이다.
엄마, 아빠는 아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꽤 오래전에 들은 얘기다. IMF시기에 회사에서 잘린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매일아침 아이 등교 시간 전에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다는 어느 아버지. 그런데 그 덕분에 무기력을 이겨내고 매일 도서관과 공원산책을 했고,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적은 수입이긴 하지만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나태하지 않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종종 남편과 언성을 높이며 거칠게 부부싸움을 하던 나의 지인은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는 절대로 아이 있는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는단다. 그의 표현으로는 '성질을 죽이게 된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조곤조곤 대화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었고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 장점이 있단다. 아이의 시선 혹은 아이의 존재가 만들어낸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까.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그 자체로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게 된다. 물론 인간이기에 약해질 수도 있고, 성질을 부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일 것 같다. 타인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이의 눈에만 좋은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선한 행위가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철이 든다는 말이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철이 들었기 때문에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생기면 아이의 존재가 엄마, 아빠를 더 나은 사람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더 나은 사람이고 싶어 진다. 그건 아마 단순히 아이가 나를 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가 나를 보는 눈이 키워졌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 세상의 중심으로만 살아갈 때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졌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입장이 되면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타인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을 타인으로서 살필 수 있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을 뗴어놓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되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다.
관찰자의 시선을 키운다는 건,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은 휴대폰(혹은 컴퓨터)으로 글을 읽고 있다. 그런데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 숨을 쉴 때도 숨을 쉬는 '나'가 있고, 숨을 쉬는 나를 알아차리는 '나'가 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나'가 바로 관찰자의 시선이다. 다른 말로는 '배경자아'라고도 하며 '메타인지'라고도 할 수 있다(이외에도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이러한 관찰자 (배경자아, 메타인지)의 시선을 키울수록 자기 조절력이 높아진다. 이 것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열쇠이기도 하다.
엄마아빠가 되고 철이 드는 것은 아마도 아이를 돌보고 상호작용하며 저절로 이 관찰자의 시선이 커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이가 아닌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인 것이다.
나아가 아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시선을 아이가 자기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는 것처럼 우리가 자신에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엄마의 시선을 내면화해서 건강한 자아를 만들어 가듯, 엄마들도 내면에 따뜻한 시선을 키워냄으로써 건강한 자아상을 만들고, 건강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단순해 보이는 육아가 아이와 엄마의 관계 속 서로의 내면에서는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경이롭다. 엄마의 시선을 통해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나고, 아이의 시선을 통해 엄마는 엄마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변화시키고 돌본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만들고 계속해서 상호 영향을 주며 너도 나도 자라나는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자라나지만, 실은 아이의 내면에도 엄마가 있고, 엄마의 내면에도 아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새싹이 자라날 때 햇빛과 공기와 빗방울을 흡수하여 자라나기에, 피어난 꽃 한 송이에 모든 것이 섞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켰기에 내면 깊은 곳에서는 결코 경계 지을 수 없는 연결된 존재가 아닌가 한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제 이곳 폴란드는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요. 11월이 지나면 아마 오후 세시만 되어도 깜깜하겠죠. 해가 길었던 여름에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햇빛을 쬐고 바깥 구경을 했는데요. 이제 겨울이 되어 밤이 길어지면 집에서 나 자신과 있을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시선을 바깥에서 내 내면으로 돌려 돌봐주고 안아주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들 추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면서 마음도 잘 보살피는 나날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집에만 계시면.............. 살찝니다.(?)
많이 움직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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