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갑작스럽게 기운이 없고 열이 계속 오르던 날이었다. 에너지가 넘쳐 평소에는 잘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힘없이 스르르 잠이 들었던 밤. 젖은 수건으로 여기저기 닦아주면서 옆에 누워 있었다. 이곳 타국에서는 병원을 가기도 쉽지 않아 혹여라도 심각하게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바짝 긴장해 있었다.
쉽게 잠들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열어 목적 없이 이것저것을 보는데, 잠들었던 아이가 갑자기 '엄마?'하고 부르며 내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휴대폰 불빛 때문에 잠이 깼나 싶어 급히 폰을 껐다. 그런데 아이가 내 품을 파고들면서 ' 네가 있어서 고마워'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좀 전과 다름없이 힘없이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잠깐 잠꼬대를 했던 것처럼.
고열을 못 이겨 잠이든 아이가 대뜸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단지 일곱 글자일 뿐이었는데, 잠깐이지만 행복감과 충만감에 푹 젖었다. 긴장과 불안이 씻겨져 내려갔다. 천국에 잠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열이 좀처럼 내리지 않아 벌서는 기분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그 한마디로 나의 걱정과 수고를 다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부정회로만 돌리던 나는 그제야 '아이는 씩씩하게 낫고 있는 중이야'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마음이면 지옥도 버틸만하겠다 싶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 이건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며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우주다. 학령기에 접어들고 커갈수록 또래관계의 영향이 커지지만 그럼에도 부모라는 세계는 성인이 될 때까지 토양이 되고 배경이 된다. 그런데 그만큼 아이도 부모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존재다. 아이의 미소 한 번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세상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는 흡사 연인관계 같다. 사랑에 빠지면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해지는 것.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이 요동치는 경험은 사랑이 주는 특별한 체험이다.
그렇다. 우리는 육아를 하기 이전에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돌봄 아래에는 언제나 사랑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내 아이' '내 책임' 나아가서는 '나의 소유' '나의 분신'이 되기도 하는 아이라는 존재. 이런 생각은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나아가 아이와 과도하게 밀착되어 버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은 우리가 보통의 타인을 마주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 하면서 남보다 더 이해를 못 해주기도 하고, '내 아이인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하면서 자책하는 일도 생긴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고 힘든 게 당연하다. 내가 아니니까. 나와 다르니까.
내가 낳아서 기르고 나를 닮았고 아이의 기쁨과 슬픔을 대부분 알고 있지만, 엄연히 타인이다. 탯줄을 자른 순간부터 나와 분리되어 있는 내가 아닌 존재. 물론 이를 구태여 의식하면서 육아를 하지는 않지만 망각해서도 안된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녀를 독립적인 객체로 인정하지 않아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 동안 무척 중요한 전제가 된다. 아이가 타인이라는 것을 깊이 받아들인다면 아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에 힘이 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와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또 무엇보다 육아를 하는 엄마의 입장에서의 다양한 감정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타인'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단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과 감정소모로부터 나와 자녀를 지킬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 보자.
나와 다른 욕구를 가진 존재
타인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 즉,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실은 나 자신도 통제하기 몹시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나'라는 세상이 어려움의 영역이라면 '타인'은 불가능의 영역인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관계는 가까운 대로 먼 관계는 먼 대로 잘 지내기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학창 시절 친구관계는 항상 편하고 좋았던가? 회사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멀리 갈 것도 없다. 가족과의 관계는 무수한 상처와 아픔과 고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던가. 또 연인, 부부관계가 꽃길이기만 하다는 얘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렇듯 인간관계는 본디 어려운 것이다. 그 타인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잘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러니 적응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배려와 존중이 필수이며, 공부하고 또 노력해야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와 다른 욕구를 가졌기 때문이다.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매 순간 욕구와 욕구간의 충돌이다. 욕구는 그 사람을 굴러가게 하는 엔진과 같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엔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건 내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아이를 내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키우고 돌보고 잘 지내려 하니 힘들 수밖에. 아이가 어린 시기에는 아무래도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에만도 대부분의 에너지가 쏟긴다. 동시에 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잠이 부족하고 밥을 거르기도 한다. 아이를 내 몸보다 귀하게 돌보느라 나를 챙기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 돌 무렵을 지나면 아이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있지 않고 강력하게 표현하고 요구하는 아이로 커간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새로운 욕구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능동적인 존재가 되니 양육자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아이는 호기심에 위험한 행동을 하고 싶어 하고, 엄마는 그걸 막아야 아이를 지킬 수 있다. 그야말로 강아지에서 사람으로 변해가는 시기. 어쩌면 '미운 세 살' '미운 일곱 살'과 같은 표현은 아직 덜 다듬어지고 논리가 없는 이 생명체를 어떻게든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부모의 애환이 만들어낸 건 아닐까. 고집이 세고 떼를 쓰는 아이 앞에 붙는 '미운'이라는 표현은 타인의 시선일 뿐, 아이는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단계를 거치고 있는 중이다.
마음이론(theory of mind)의 불균형
미운 세 살, 미운 일곱 살에 육아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이의 욕구를 이해하지만 다 받아줄 수는 없고(논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욕구들이 대다수^^;), 아이는 내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엄마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의도로 행동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이 때문에 때때로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와 항상 함께 있는데도 외롭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타인의 생각, 감정, 의도, 욕구를 추론하여 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 것을 마음이론(Theory of mind)라고 한다. 쉽게 말해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모두가 저마다의 심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이 마음이론을 장착하고 있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원이다. 이 기능이 없이는 타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 나아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3세 정도의 아이는 타인과 나의 마음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마음이론은 아직 미숙한 상태이다. 점진적으로 발달하여 만 9세 정도가 되어야 성인과 비슷한 수준에서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엄마와 아이 간에는 마음이론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고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엄마의 욕구는 계속해서 좌절되고, 아이의 욕구를 이해하지만 받아줄 수 없는 상황들은 아이와의 충돌, 양육자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또한 부모입장에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잘 다룰 수 있도록 알려주고 훈육해야 하는 과제까지 있으니 어려운 단계이다.
그러면 아이의 마음이론이 잘 확립이 되면 아이와의 관계가 쉬워질까? 그렇지는 않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아직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절과 통제를 담당하는 뇌인 전두엽이 덜 발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내면을 본인도 감당하지 못하는 시기이기에 이때의 관계는 더 격렬한 충돌과 위기가 될 수 있다.
여하튼, 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와의 관계에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엄마가 스스로의 욕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간혹 섬세하고 민감한 엄마들은 아이의 욕구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이는 내 몸처럼 돌보고, 내 몸과 마음은 남보다 못하게 다루는 경우라면 곤란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구에는 둔감하다면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 아이를 섬세하게 케어하지만 원하는 것을 좌절시키지는 것을 어려워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나 원하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는 번아웃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인간은 결코 타인의 욕구,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무엇이 채워지지 않아서 자신이 갈증을 느끼고, 휴식을 원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엄마들의 자기 돌봄에 필수이다.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도록 적절히 타협할 수 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계속해서 아이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일도 어렵다. 아이 입장에서도 그것이 결코 건강한 방식은 아니다. 아이에게도 적절한 좌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잘 돌보는 건강한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이도 마음이론을 발달시켜 갈 수 있다.
정리해 보면, 마음이론의 발달상의 불균형 때문에 아이와의 관계는 힘들 수밖에 없지만, '욕구에 대한 민감성'이 아이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꼭 살펴보기를 바란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면 자기 자신의 것도 중요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돌보고 함께할 에너지가 적절히 소진되지 않을 테니까. 육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의 마음을 섬세하게 인지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에 필요한 것을 건강한 방식으로 제공해 주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나와 다른 욕구를 지닌 타인과의 관계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습관이며 그것이 곧 엄마의 자기 돌봄일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하는 아이라는 존재, 사랑하는 이 아이와 지혜롭게 관계 맺기 위해서 꼭 아이의 욕구만큼이나 나 자신의 욕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런 엄마와 함께하는 아이는 분명 천국과 지옥 어디에서도 자신을 잘 지켜내는 존재로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
10화 끝.
해 질 녘의 풍경은 왜 이리 편안할까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연재를 무사히 채워갈 수 있을까 했는데 그래도 10화까지 왔네요. 감개무량합니다. (혼자서 뿌듯..) 아마도 12화까지 연재후 한 달간은 휴재를 갖고 12월에 다시 이어가게 될 것 같아요. 재정비도 필요할 것 같고, 한국휴가도 예정되어 있어서요. 정확한 내용은 다음화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졌어요. 가을은 어디 가고 갑자기 겨울이 왔나요.... 올해가 무려 두 달 반이나 남았지만 날씨 때문인지 곧 크리스마스가 될 것만 같습니다. 햇빛이 유난히 더 소중해지는 나날들. 모두들 하루하루 소중하게 몸 잘 챙기면서 보내고 계시기를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