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째 날
아침 7시 즈음, 허전한 옆자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분명 어젯밤 침대에 함께 누웠던 미선이가 옆에 없었다.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보니 눈밑이 움푹 파인 것처럼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미선이가 작은 방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왜 못 잤냐고 물으며 두 손으로는 커튼을 쳐 오늘 날씨가 어떤지 확인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쯧, 오늘도 맑은 제주도는 못 보겠군.’
왜 못 잤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알 것 같았다. 미선이는 잠자리가 바뀌거나 간혹 집에서도 잠에 들기를 어려워하는데, 2박 3일 짧은 제주도 투어 일정을 잘 소화하기 위해서는 숙면해야 하므로 잠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들을 집에서 챙겨 왔다고 했었다. 어제 침대에 누워서는 잠이 오지 않을 때 유튜브로 부동산 강의를 보면 바로 골아떨어진다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었다.
소파 옆 테이블에는 차 티백과 수면 유도제가 담긴 약봉투, 땅콩 껍질과 귤껍질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 잔해들은 어제 벌인 잠과의 사투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불면증이지, 뭐. 냉장고에 있던 키위도 까먹었어. 키위 먹으면 잠이 온다고 하더라고.”
미선이는 소파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처음 들어 보는 생활 상식을 내게 말해 주었다. 싱크대를 보니 키위 껍질과 과도가 놓여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기 위해 낯선 곳의 싱크대에서 홀로 키위를 까먹었을 친구를 상상하니 짠하고 안쓰러우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미선이는 지난밤 잠에 들기 위해 벌였던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다섯 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야 그 시도들이 결코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어젯밤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다 오늘 갈 곳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급하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일과 육아로부터 해방되어 제주도행을 결정한 미선이는 가고 싶은 곳이 무척 많았다. 마치 여행 기간이 2박 3일이라는 사실을, 그 여행의 첫날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세화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잊은 듯했다.
게다가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숙소가 있는 제주도 동쪽이 아닌 서쪽 아래에 있는 산방산 유채꽃을 보고 근처 오름에 올라가자고 했을 때는 과연 이 여행이 순항할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꼭 가보고 싶다던 아르떼 뮤지엄까지 다녀오려면 이동 시간만 3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일정을 수정하길 바라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선이는 해맑게 말했다.
“우도도 가면 좋겠다!”
걱정스러운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제주도가 생각보다 넓다고 은근히 어필하는 내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다행히도 미선이는 사실상 단 하루뿐인 여행 일정 동안 가볼 곳으로 제주도 동쪽을 제안했다.
오전 9시 반이 조금 넘어 함덕에 도착했다. 서우봉 위에 피었다던 유채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함덕 해변은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해변 옆의 서우봉 중턱에 올라 아직은 듬성듬성 피어있는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세화에서도 걷다 보면 저 멀리 밭에 핀 유채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나 가까이, 유채꽃밭 안에서 꽃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채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향기는 어떠려나?
모든 꽃에서 좋은 향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냄새가 빨리 가실 수 있게 코 밑을 열심히 닦아 냈다.
미선이는 옆으로 서봐라, 자연스럽게 웃어봐라, 눈을 내리 깔아라 등 내 어색한 포즈를 수정해 가며 열정적인 포토그래퍼처럼 사진을 찍어 주었다.
홀로 제주도에 지내면 모르는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내 사진을 찍기 어려울뿐더러 한 번쯤은 꼭 멋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셀카봉을 가지고 나가도 금세 잊고 풍경이나 음식 사진을 찍어댔던 터라 휴대폰 속 사진첩 내 사진이라곤 며칠 전 외출 전에 화장대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 두 어장 밖에 없었었다. 그렇게 나를 찍는 것에는 소홀해졌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다니다 보니 내 사진도 찍게 되고 심지어는 꽤 괜찮은 인생 샷도 건졌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유채꽃밭에 앉아 턱 밑을 양손으로 받쳐 둘이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틈만 나면 스티커 사진을 찍어대던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덕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미리 찾아본 음식점에서 칼국수를 먹고 김녕으로 향했다. 김녕 해변에서는 혼자라면 절대 가보지 않았을, sns에서 유명한 사진 스팟인 바다로 난 길에 가 진귀한 풍경을 눈과 휴대폰에 담았다. 또, 나 혼자라면 굳이 회색빛 하늘로 칙칙한, 바람도 많이 불어 돌아다니기에는 어설픈 이 날씨에 가지 않았을 성산일출봉에서 멋진 카페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따뜻하고 맛있는 한라봉차를 마시며 흐린 날만의 또 다른 모습을 선사하는 성산일출봉을 감상했다.
오후 2시, 제주도에 와서 가장 빡빡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카페 <Cafe The Light>의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있으니 오늘 할 일을 다 해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짧은 휴가를 맞이해 제주도에 온 친구 미선이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을 꼭 다 가게 해주리라고 생각했던 터라 스스로가 대견하게도 느껴졌다.
“봐봐, 내가 빡세게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계획한 일정을 다 소화하고 나면 이렇게 편하게 쉰다니까. 시간도 아직 2시밖에 안 됐어.”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미선이는 말했다.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돌아다니느라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배가 슬슬 고파와 세화로 돌아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집 근처에서 회를 포장해 집에서 먹기로 하고 세화 해변으로 향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하고 오늘은 세화 밖으로만 돌아다닌 탓에 아직 세화 바다를 보지 못한 미선이를 위해서였다. 여전히 하늘은 구름으로 빽빽이 뒤덮여 있기도 했고 얼마 전 해가 바다 너머로 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난 터라 저녁 바다에는 흥미가 떨어져 있었다. 나 혼자라면 결코 가질 않았을 해질 무렵의 바다였지만 내일이면 육지로 떠나는 친구가 이러다가는 내가 누구든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세화 바다를 못 보고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조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해변을 걸었다.
“와….”
투명한 세화 바다와 구름으로 뒤덮여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도 그 붉은빛은 숨길 수 없는 해가 만들어 내는 하늘을 보고 미선이는 탄성을 질렀다.
세화 토박이에 비하면 잠시 머무르는, 아직 일주일 밤을 간신히 넘은 새내기인 주제에 나는 마치 세화 주민인 것처럼, 이 풍경에 감동하면 어쩐지 모양이 빠지는 것처럼, 조금 뒤로 물러서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되게 멋있네, 오늘 하늘.”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미선이는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미선이를 찍어 주며 나는 말했다.
네가 있어서 나는 오늘,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그 풍경은 혼자서는 볼 수 없었을 풍경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