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째 날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지난번 장 섰을 때 먹지 못한 잔치국수가 요 며칠 내내 눈앞에 아른거렸던 터라 아침부터 일찍 집을 나섰다. 구좌 파출소 옆 골목을 지나 해변 앞 오일장을 향해서 걷는데 눈앞의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뒷짐 진 손에 바구니나 봉다리를 쥔 채 팔랑팔랑 들고 가는 할머니, 달그락달그락 쇼핑용 카트를 끌고 느리게 걷는 할아버지, 나와 같이 해변으로 향하는 동무들이 계속 눈에 띈다. 역시 장날은 장날이구나.
장터에 도착하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눈발 흩날리던 5일 전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햇빛이 내리쬐는 오늘 장터는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로 활기차다. 시장 정문이 아닌 옆구리 쪽에 다다르자 가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각종 제주 과일을 파는 가게부터 우도 땅콩을 파는 가판대, 청국장과 왜인지 모르게 동해안 해산물을 파는 트럭까지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좌우를 살피며 구경하느라 바쁜 목이 다 저려온다. 그러던 중 발견한 분식 가판대. 떡볶이, 어묵, 핫도그, 호떡, 떡꼬치 등등 맛있는 거 옆에 맛있는 거다. 뭐부터 먹지?
삼삼오오 가족, 친구들과 와 여러 음식을 시켜 나눠먹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앉아 혼자서 떡볶이를 먹는다는 게 약간은 쑥스러웠지만 분식 앞에서 그게 대수랴. 나는 떡볶이 1인분을 시키고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떡볶이 위에 하얀 김이 올라온다. 진한 양념이 밴 새빨간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아니, 맛보다는 분위기에 취한다. 내가 간 분식 가판대는 여러 메뉴들을 ㄴ자 형태로 늘어놓았고 뒤쪽에는 천막 위부터 내려오는 긴 천을 쳐두고 그 앞에 짐을 쌓아 놓았다. 자연스레 생기는 안쪽의 공간은 테이블을 놓아 손님들이 음식을 먹고 갈 수 있게 해 두었는데, 거기 앉아 떡볶이를 먹자니 사람 구경하는 맛이 쏠쏠할 뿐만 아니라 가판대와 음식을 조리하는 분들이 서서 가판대 앞 인파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아 든든한 마음까지 들었다.
떡볶이를 다 먹고 어묵 국물까지 마신 다음 본격적으로 장터로 들어섰다. 대형 마트에서는 무미건조하게 봤던 채소들이 여기서는 괜스레 처음 보는 것 마냥 신기하다. 무슨 채소들이 있나 구경하고 있는데 채소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뭐를 찾느냐고 묻는다. 단맛이 잘 들었다는 겨울 무와 당근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신선한 채소들을 설명해 주셨는데 마땅히 해 먹을 요리가 생각나지 않아 둘러보고 오겠다는 암묵적 거절을 하고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 집 옷 가게에 들어서는 할머니들의 생소하면서도 정겨운 말소리가 들린다. "여기 있수꽈?"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투가 참 귀엽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에 보는 번데기와 처음 보는 쌍화차 카트까지 재밌는 것 투성인 장터에서 내 목과 눈이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러다 한 반찬 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손님이 바글바글한 곳이었는데 가장 인기 메뉴는 양념게장이었다. 반찬 가게에서 반찬을 사본 적이 별로 없어 괜찮을까 주저했지만 큰 대야에 담겨있는 양념 게장이 연이어 들리는 “양념 게장 만 원어치요.”라는 소리와 함께 곧 동이 날 것 같아 나도 외치고 말았다. "사장님, 저도 양념 게장 오천 원치요!"
주인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봄동 무침까지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 기대가 된다.
저녁에 있을 요가 시간 전까지 좀 쉴까 했는데 갑자기 제주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내려갔던 리스트가 떠오른다. 일몰. 일몰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검색해보니 일몰 시간은 6시 20분쯤이다. 참, 요즘 세상 좋아졌지. 일몰 시간을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고 말이다. 일몰까지는 30분 이상 남아 천천히 해변으로 가 해가 지기를 기다리면 되겠다 싶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해변 쪽으로 걷고 있는데 자꾸만 해는 내 앞이 아니라 뒤에 머물러 있다. 이상하다. 바다 위에 지는 해를 보려면 해가 내 앞 쪽에, 수면 위에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일몰까지는 20분 정도 남았는데,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는 당연한 이치가 떠오른다. 그리곤 내가 제주도 동쪽, 무려 성산일출봉과 멀지 않은 위치의 세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는 바다 쪽으로 지지 않는다. 거, 일몰 한 번 안 본 티가 나는 구만.
나는 곧장 걸음을 돌려 해가 지는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벌써 헤어질 준비를 하는 건지 해가 붉게 달아올라 익는 것을 넘어 제 열에 못 이겨 곧 타버릴 것 같다. 이대로 해가 사라질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어째 걸어도 걸어도 해는 건물 뒤에 머문다. 대부분 5층 이하의 건물들로 높진 않지만 듬성듬성 솟은 건물들과 담장 낮은 집들 사이로 해가 자꾸만 지고 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깨닫는다. 오늘 완전한 일몰은 볼 수 없다.
세화 해변에서 일몰을 볼 수 없다면 나는 그럼 어디에서 일몰을 봐야 하나 싶어 검색해 보니 동쪽으로 좀 더 가면 있는 하도 해수욕장 근처 용목개와당 저수지나 세화 근처에 있는 다랑쉬 오름에 오르면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진작에 찾아볼 걸, 일몰 시간만 찾아보고 문명의 발전에 흐뭇해하다니 이런 바보도 없다.
오늘 일몰은 못 본다고 하니 허탈하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터벅터벅 집 쪽으로 걷고 있는데 여전히 해는 사라지지 않고 낮은 집들 위에 떠있는 구름 위에 살짝 걸쳐 있다. 이제 곧 사라질 것을 암시하며 아주 붉고 밝게 빛나면서 말이다.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붉게 타오르는 해와, 함께 물들어 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멈춰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비록 구름 뒤에 자취를 감춘 뒤에도 여전히 밝게 지면을 비추고 있을 해였지만 내게는 요 근래 보았던 노을 중 가장 아름다웠다.
집 앞 요가원에 미리 신청한 요가 일일 클래스를 듣고 나오는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닌 밤중에 뜀박질로 홀딱 젖은 채로 집에 도착했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한 요가 때문에 땀을 무지 흘렸는데 오는 길에 뛰기까지 했으니 배가 더욱 고팠다. 얼른 샤워를 하고 오늘 사온 반찬들로 밥상을 차렸다. 밥 먹을 때 동영상 보는 것은 국룰이랄까? 오늘은 또 무얼 보지 하며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를 왔다 갔다 한다. 눈 길 한 번 준 적 없던 도라에몽이 오늘은 왠지 모르게 눈에 밟힌다. 그래, 까짓 거 한 번 도전해 보지 뭐.
식탁 한 켠에 도라에몽을 켜 두고 양념게장과 봄동 무침을 차례로 맛봤다. 괜한 군중심리에 휩쓸려 먹지도 않을 반찬을 산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반찬들은 너무 맛있었고 거짓말 조금 보태 먹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군중심리도 좋은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저녁 식사 메이트로 함께 했던 도라에몽은 내 스타일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언제나 마음의 위안에 되어 주는 무한도전을 켰다.
새로운 도전들로 가득 찬 하루였다. 아주 작은 도전이지만 내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이 소소한 도전들을 나는 제주에서 앞으로도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