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째 날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일어나 티셔츠와 후드 집업, 9부(7부인 것 같지만 내게는 9부인) 레깅스로 갈아입은 후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어제 미선이가 떠난 후 밀린 청소와 논문을 마무리 짓고 나니 무척 허기가 져 냉장고에 있던 재료로 후다닥 고추장찌개를 해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밥을 두 공기나 먹었었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는 배가 고프지 않아 공복에 조깅을 했다. 기운이 없어 잘 뛰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큰 어려움 없이 원래 코스인 해변 끝 흰 등대까지 달렸다.
아침까지 굶었거만 어제저녁에 밥을 두 공기나 먹은 탓인지 평소보다 몸이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출렁출렁
출렁이는 것이 바다만은 아니었다.
아침도 굶었겠다, 이른 점심을 먹어볼까 싶어 브런치 가게를 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찾아 두었던 <풍미독서>로 향했다. 구좌 당근으로 만든 당근 수프로 유명한 <풍미독서>는 집 뒤편의 일주동로를 건너면 있는 세화 어린이집을 지나 걸어서 20~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아직까지 집 뒤편 넘어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걷는 것은 호기심 가득한 여정이다. 첫 발을 딛는 것부터 새롭다. 어떤 길들이 펼쳐질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던 멋들어진 꽃들과 새들을 만나기도 하고 다소 밋밋한 풍경에 실망하기도 한다. <풍미독서>로 가는 길은 자금까지의 제주 길과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예쁜 집들과 하룻밤 묵어보고 싶을 만큼 고즈넉한 민박집을 발견할 수 있었고, 구름으로 꽉 찬 하늘이 점차 파란 민낯을 드러내는 모습도 볼 수 있어 나름대로 즐거웠다.
'이쯤 되면 다 왔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저 멀리 <풍미독서> 간판이 보였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그런지 내가 첫 손님이었다. 연세가 꽤 되어 보이는 남자분이 나와 친절한 말투로, 그러나 웃음기 없는 얼굴로 혼자 오셨냐고 묻고는 따로 마련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주방과 주문을 받는 곳과는 분리되어 있었는데 깔끔하고 쾌적했다. 벽면 한쪽은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파랗고 하얗게 빛이 바랜 책들이 책꽂이에 다닥다닥 꽂혀 았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소품들로 가득한 이 가게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격식을 차려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문은 키오스크를 이용해서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서울에서는 자주 이용하던 키오스크지만 제주도에서는 처음 사용해서인지 미래 세계에 와 있는 듯했다.
유명하다는 당근 수프와 새우버거, 그리고 감자튀김까지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가게 내부를 구경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 선반 위에 놓인 액자, 벽 한쪽에 멋들어지게 적힌 문구, 인테리어 소품들을 살폈다. 넓은 이 공간을 통째로 빌린 것 같은 기분에 신이 나 이 각도 저 각도로 사진을 찍다 보니 아까 자리를 안내해 주셨던 분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사장님 일지, 알바생 일지 모를 그 남성분은 내가 서서 살펴보았던 책이 흐트러진 데가 없는지 살피고는 본인이 생각한 기준에 벗어났는지 각을 맞추고 자리를 떠났다.
분명 아침에는 불어버린 몸을 체감하며 살을 빼겠노라 다짐했건만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보니 오늘도 양 조절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근 수프는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었는데 '당근이 이런 맛이었던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새우버거는 양념치킨 맛이 살짝 도는 소스가 새우살로 만든 두툼한 패티와 그 위에 올라간 통새우와 잘 어우러졌다.
평소 같으면 음식 사진을 찍고 남자 친구에게 보내고는 '너무 맛있다.' ' 먹고 싶지 않느냐'라며 짓궂게 놀려줬을 텐데, 올해 들어 유행하고 있는 오미크론 감염을 피할 수 없었던 남자 친구가 집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어 차마 사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온몸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쑤시고 틈만 나면 잔기침을 하는데도 쉬지 못하고 재택근무를 해야 해서 우울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일주일 동안의 자가격리 기간으로 인해 주말에 있을 친한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을 남자 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런 남자 친구를 두고 차마 제주도에서 한가로이 브런치 가게에서 새우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한 손에는 두툼한 새우버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말을 카톡으로 보내며 남자 친구를 위로해 주었다.
음식을 다 먹을 때쯤 하늘이 파랗게 갰다. 창가 앞 테이블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대로 돌아가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오렌지 생과일주스를 한 잔 주문하고 엉덩이를 의자에 더 붙였다 가기로 했다.
어떤 가게는 처음 들어서자마자 이곳은 앞으로 내 아지트가 될 것 같다 싶은 곳이 있고, 분위기도 음식 맛도 좋은데 어쩐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싶은 곳이 있는데 <풍미독서>는 아쉽게도 내게 후자였다. 이래 놓고 불현듯 다시 오고 싶어 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제주에 한 달간 머무는 이번 시즌만큼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풍미독서>를 지도에 검색하니 근처에 책방이 있어 잠깐 들리기로 했다.
<제주 풀무질> 옆에는 동백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고 다행히도 아직 지지 않은 반가운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넓지 않은 공간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책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분이 내게 친절한 말투로 입장 전 QR코드를 찍어 줄 것을 부탁해왔다. 책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지만 공간은 좁은 편이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는데 반가운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에 오니 한강 작가가 쓴 제주 4.3 사건에 관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싶었었다. 지난번 평대 <달책빵>에서도 책을 찾아보려 했지만 발견하지 못해 제주에 오기로 했던 미선이나 얼마 뒤 제주에 올 엄마와 이모들에게 부탁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미 읽으려고 가져온 책이 두 권 있기도 했고 돌아갈 때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 우연히 그 책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구해 읽지는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만남을 기대하지 않던 책방에서 바라던 책을 찾으니 운명이다 싶어 얼른 그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다.
언제 계산을 할까 사장님이 여유 있을 틈을 찾아 힐끔힐끔 곁눈질로 카운터를 보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손님 한 명이 계산대로 향했다. 긴 검정 코트를 입고 DSLR 카메라를 들고 있던 그 청년에게 사장님은 큰 소리로 물었다.
혼자 왔어요?
청년이 대답했다.
네. 검색하다가 찾았는데 꼭 와보고 싶어 오게 되었어요.
그러자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사장님이 말했다.
잘 왔네. 사진 한 장 찍고 가요.
어라? 본인이랑 사진을 찍자는 건가? 내가 알아보지 못한 유명인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살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니 가게 한편에 마련된 포토존 비스무리한 곳에 청년을 세워두고 사장님은 청년으로부터 넘겨받은 듯한 DSLR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이런 데 혼자 오면 사진 찍기 어렵잖아요. 내가 찍어 줘야지.
작은 오해와 훈훈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호의 넘치는 사장님이 내게도 사진을 찍어 주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화장을 하긴 했지만 사진을 찍고 싶은 상태는 아닌 데다가 평소보다 살이 찐 것 같은 오늘 그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드르륵 소리가 정겨운 미닫이 문을 그 손님이 열고 나가자 다음은 내 차례다 싶어 떨리는 마음으로 카운터 앞에 섰다.
이 책 계산해 주세요.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사장님이 말했다.
어, 저도 얼마 전에 이 책 읽었는데, 너무 순식간에 읽혀서 다시 읽어보려고요.
사장님도 읽어 보았다는 얘기에 나도 들떠 말했다.
제주도에 와서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찾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여기서 발견했어요.
아주 훌륭한 생각이네. 슬프지만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계산을 위해 건넨 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긁고 난 뒤 다시 전해 주면서 사장님은 말했다.
'이제 사진을 찍어 준다고 하시려나?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하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장님이 사진 찍자고 하기를 기다리는데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나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장님의 눈빛에 나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봐 나는 후다닥 가게를 뛰쳐나왔다.
비록 내게는 사진 찍는 것을 권하지 않은 야박한(?) 사장님이지만 어쩐지 나는 이곳에 다시 올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예감은 다시 오고 싶다는 내 강렬한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보다 잠시 들른 개울가가 더 좋은 날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