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째 날
“사장님, 저 어묵 하나 먹을게요.”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손님들에 부족해진 어묵과 파를 분주히 보충하고 계신 아주머니께 말했다.
나는 오늘도 오일장에 와있다.
회사를 쉬면서 업무 때문에 날짜를 기억해야 할 필요는 못 느끼고 있지만 나는 매일같이 오늘이 며칠인지 떠올리며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손으로 꼽고 있었다.
나는 오일장에 그야말로 중독되었다.
필요한 게 떨어지면 그때 그때 갈 수 있는 집 앞 편의점이나 하나로 마트도 좋지만 오일장은 오일장만의 매력이 있다.
제철 채소와 과일, 맛있는 음식과 신선한 해산물, 의류, 공산품, 지역 특산물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곳이 오일장이다. (BTS 앨범까지 발견했으니 말 다했다.)
이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오일장을 오일장답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활기다. 자식과도 같은 물건들을 각 잡고 줄지어 진열해 놓으면 손님들은 그 앞을 기웃기웃 거리기도 하고 가만히 서서 어떤 물건이 좋은지 살펴보기도 한다.
무얼 살지 쭈뼛쭈뼛하는 손님들에게 상인들은 그 제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데 이는 나같이 오일장을 제대로 방문한 적 없는 촌뜨기에게는 길을 안내해 주는 등대와 같아 설명을 듣고 내가 사야 할지 또는 말아야 할지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와 살 것인지 말 것인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이것들이 뿜어 내는 뜨거운 열기가 오일장을 언제나 설레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러한 사람들의 열띤 대화 속에서 나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시장 인심이다.
매번 포착하지는 못하지만, 오늘 오일장에서는 운 좋게 시장 인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나름 제주 한 달 살이를 하면서 살이 쪄서 돌아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음식 양을 조절하고 있다. 맘 같아선 어묵 3개에 뜨거운 흑설탕이 가득 든 호떡과 갓 튀긴 핫도그까지 먹고 싶었지만 점심에 먹으려고 계획한 치즈 돈가스를 위해 어묵 1개로 시장 군것질 투어를 마칠 참이었다.
내게 주어진 하나뿐인 소중한 어묵을 꼭꼭 씹어 음미하고 있는데, 내 왼쪽에 서서 어묵 3개를 내리 먹던 한 손님이 계산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2천 원만 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어묵 한 개에 700원이니 3개를 먹었으면 2,100원인데.
머릿속으로 암산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가 끝끝내 가격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그때서야 ‘아, 깎아주신 거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마트만 방문하고 카드만 사용하던 내 일상에서 무언가를 깎아 준다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할인 품목을 사거나 폐점시간이 다가올 때 파격 세일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즉석에서 깎아주는 시장 인심을 보니 왠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 금액이 단돈 100원일지라도 말이다.
내일은 엄마와 이모가 온다고 한 날인 만큼 집에서 다 같이 먹을 반찬을 좀 산 후 한라봉과 천혜향, 각종 감귤류가 진열되어 있는 과일 가게 앞에 섰다.
얼마 전 다녀 간 미선이에게 레드향을 선물로 보내고 싶어서였다. 2박 3일 동안 여행 경비를 한 사람이 결제하고 나중에 정산하기로 했는데, 경비를 계산한 미선이가 ‘얼마 안 나왔으니까 돈 줄 필요 없다.’고 말하며 쿨하게 떠나버렸다. 나 역시도 여행 온 미선이에게 뭔가 대접하고 싶어 여행 중간중간 틈틈이 결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선이가 결제한 게 훨씬 많았다. 고마운 마음에 지금 한창 맛있다는 레드향을 미선이 집에 부쳐주고 싶었다. 보내는 김에 남자 친구 집과 유일한 동거인이 제주도로 떠나 즐겁게 홀로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을 호적 메이트, 남동생에게도 보내기로 했다. 택배 송장에 주소와 연락처를 쓰고 계산을 하려는데 사장님이 말했다. “많이 하셨으니까 5천 원 빼줄게요.”
마스크 뒤에 숨긴 얼굴이지만 내가 입이 찢어질 듯이 웃고 있다는 걸 사장님도 알아챘을 것이다. 마치 반값으로 깎아준단 소리를 들은냥 말이다. 사실 5천 원도 큰돈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에누리에 숨길 수 없는 미소로 감사하다고 화답하고는 덤으로 챙겨주신 레드향이 담긴 검정 봉지와 반찬들을 양손 무겁게 들고 집으로 향했다.
반찬과 과일들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한숨 돌린 뒤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얼마 전부터 먹겠다고 벼르고 있던 집 근처 <얌얌돈가스>에 갔다.
항상 손님들이 바글 바글한 집이라 웨이팅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앞에 기다리는 팀은 한 팀뿐이었다. 15분쯤 기다리자 가게 안으로 안내받았다.
좁지만 정돈되어 있는 식당 안에 서빙을 하시는 분은 한 분이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분들은 주인 부부 같았는데, 한 분은 홀에 다른 한 분은 주방에 계시는 것 같았다.
가게는 좁고 손님은 많으니 시스템을 갖춰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는 것을 인지하신 사장님들은 아주 체계적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안내는 군더더기 없이 명확했고, 웨이팅 시간까지 정확했다.
안내받은 자리의 테이블 위에는 테이블 매트 겸 종이가 깔려 있었는데, 음식이 나오는 시간 동안 봐보라고 해 읽어 보니 얌얌돈까스에 대한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체인점이 아니라는 이야기부터 치즈 돈가스 속에 가끔 나오는 투명한 기름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에 고기를 재워서 그런 것이며, 주문과 동시에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점을 양해해 달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읽고 나니 주문한 치즈 돈가스가 나왔다.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고기가 신선한 게 느껴졌고 치즈도 듬뿍 들어 있어 치즈 돈가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도 아주 푸짐해서 반절 정도 먹고 백기를 들어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 저녁에 먹기로 했다.
포장 요청한 돈가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와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어어.. 전화로 주문한 돈가스 찾으러 왔어요.”
주인은 그 남자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하고는 미리 준비해둔 돈가스를 봉지에 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깍두기 좀 많이 넣어주세요.”라고 하자, “네, 네, 많이 넣어 드릴게요.”라고 주인이 대답했다.
그러곤 카드를 건네는 손님에게 주인은 “47,000원만 받을게요.”라고 말했다.
깎아주는 것이 시장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나는 시장 인심이 아니라 제주 인심인지, 시골 인심인지 다소 헷갈렸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친한 분이거나 단골이시구나 생각이 들었고 서울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왜 나는 안 깎아주냐며 항의하는 손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누리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격으로 사고파는 것이 공평한 것 같긴 하지만, 어쩐지 나는 인심이라 부를 수 있는 즉흥적인 에누리가 보기 좋게 느껴졌다.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