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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04. 2024

슬픔은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시 읽기] 유병록, '슬픔은' '슬픔은 이제'



슬픔은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슬픔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해진 척     


회사에서는 손인 척 일하지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웃고 떠들지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지 

    

슬픔을 들킨다면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     


네가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흔들지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지   

  

구덩이 속에서 너는 울고 있겠지만     

내가 나에게 슬픔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모르는 척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괜찮아진 척     


-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단상]

유병록 시인의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에 수록된 시 ‘슬픔은’, ‘슬픔은 이제’이다. 펼침 면에 나란히 실려있어서 어쩐지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읽게 된다.      


슬픔이 발생한 그 순간, 시인은 슬픔이 ‘양말에 난 구멍’ 같아서 ‘들키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 고요해진 ‘척’이라는 적은 걸 보면 실제로 그의 마음은 조금도 고요하지 않은 듯하다. 회사에서는 '손'인 척, 술자리에선 '입'인 척, 거리에서는 '발'인 척을 한다. 마치 마음이라는 게 아예 없다는 듯이.     

 

다음 연에서 시인은 '슬픔을 들킨다면 /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라고 말한다. 바로 이어서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라고도 한다. 시인은 배려심이 깊은 걸까, 아니면 자존심이 강한 걸까.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려는 시인이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안쓰럽다. 실컷 울어는 봤을까?    

  

아무튼 시인은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 괜찮아진 척’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구덩이 속에서 울고 있는 ‘너’를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눈물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때가 오면 그때는 어쩌나.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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