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대기업 회고록
1년 3개월 전,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이제 나의 커리어 종착지라고 생각했다. 안정적인 회사 규모, 스타트업 대비 높은 연봉과 복지도 솔깃했지만 투입되는 자금, 사이즈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그래 여긴 대기업이니까.
그리고 다시, 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간 생각을 적어보고 정확히 5개월 후 이직한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있었던 대기업이 싫어서라기 보다 새로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선택한 이직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기간 동안 대기업이라는 시스템에서 느낀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내가 있었던 곳이 금융 관련 대기업을 대표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 관련 대기업 IT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며 아쉽다고 생각한 부분을 적어본다. (겨우 1년 3개월이지만...)
대기업, 사무실도 크고 건물도 크다는 의미도 가지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많다는 뜻이 가장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사람이 많다는 건 보고 단계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작은 업무라도 담당자들이 확인을 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하고 각 단계별로 회의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타 부서와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 특히 타 부서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업무인 경우 이 보고 단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업무 자체보다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더 힘든 게 대기업에서는 많은 거 같다.
규모가 있는 만큼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인력도 상당히 많다. 저마다 그동안의 경력과 경험을 살려 프로젝트 아이디어, 기획을 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위에 분들은 이 성이 차곡차곡 순조롭게 만들어지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
갑자기 들어오는 피드백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어떻게든 프로젝트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렇게 하나둘씩 남겨진 흔적들은 초기 기획과 상당히 다른 프로젝트를 만들게 된다.
성공한 스타트업의 사례들은 대기업에서도 큰 화젯거리다. 그리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전제로 도입을 해본다. OKR이 그랬고, 자율 출퇴근제, notion 사용이 그랬다. 당연히 OKR관련 회의가 열렸고 자율출퇴근제 정책을 위한 회의도 열렸고 notion 사용을 위한 세미나도 열렸다.
하지만 이렇게 도입한 대부분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 없이 진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왜 하는지는 모른다. 그냥 하라고 해서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입한 게 진짜 그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묘하게 변질된다.)
아쉬운 점이 물론 이것보다 더 많지만 개인적으로 1년 3개월이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조직을 경험했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식을 접해보았으며 무엇보다 같은 팀으로 입사했던 유능하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아쉬운 점을 해소해보고 싶은 생각도 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막상 업무를 하게 되면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겠지만 1년 3개월의 경험은 또 다른 업무기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대기업에서의 1년 3개월, 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