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MI Oct 19. 2021

여행의 일기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

   유럽의 겨울밤은 빨리 찾아오고 늦게 떠나간다. 밤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의 밤행은 초짜 여행자인 나에게는 두려움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특별히 밤에 나갈 곳도 없었다. 식당도 마트도 겨울의 상가들은 일찍 문을 닫았다. 그러기에 특히나 밤이면 숙소에 홀로 누워있을 뿐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호스텔에 머물 때면 그들과 대화도 하고 함께 어울려 파티도 즐기곤 했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를 지나 스코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올 때까지 늘 누군가와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고, 바람이 점점 차가워질수록 호스텔에도 여행객들이 상당수 줄었다. 한 번은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좀 외롭기는 해도 장점도 있다. 호스트와 친해지기 유리했으며, 친해진 후에는 나의 편의를 잘 봐주었다. 또 방 값을 흥정하기에도 유리했다. 좀 외로우면 어떠하랴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1유로가 마치 10유로와도 같은 것이거늘.


   이렇듯 혼자된 밤에는 침대에 홀로 누워 뒤척거리를 반복한다.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음악도 들으면서 말이다. 이것조차 지루해질 때도 있고, 호스텔의 네트워크 사정이 좋지 않아서 끊어지는 영상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가장 아날로그 적인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일기 쓰기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일기를 여행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샀다. 그리고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이어리를 잘 활용해왔다. 그곳에는 항상 나의 스케줄이 적혀있었고, 나의 일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다만, 내 감정과 기분은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내가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에 대한 내용 따위도 없었다. 다이어리를 구매하고 나는 플래너로만 사용했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나는 갈색 가죽의 노란색 끈이 달린 예쁜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여행 계획을 적고, 기록할 플래너의 목적으로 말이다. 그러다 그 목적이 점점 변하여 오늘의 감정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 정보로만 가득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획보다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할 목적으로 나의 머릿속의 것들을 글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해소가 되거나, 지나가게 되는 순간에 그 기분을 적어 넣었다. 처음 쓰는 나의 기분과 나의 하루는 어색했다. 악필도 그런 악필이 없었다. 그렇게 일기를 쓰게 되었다.


   하루는 적어 놓은 글들을 훑어보았다.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읽다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머리가 맑아지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써왔던 페이지를 넘기다가 노트 사이에 껴놓았던 카드 뭉탱이가 떨어졌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사 온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카드를 보자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지금 나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펜을 꺼냈다. 여전히 악필이지만 조심스레 펜을 들어 글을 옮겼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살의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는데

뭐가 이렇게 겁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막연한 미래가 어렸을 때는 느껴지지도 않더니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바로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가슴을 조여옵니다.


당신의 새해에는 어떤 질문을 받고 있나요?

어떤 공부를 할지 질문을 받기도 하고,

어떻게 직장에 다닐지 질문을 받기도 하고,

학교는 어디로 갈지 질문을 받기도 하겠죠.

아마 당신은 어떤 삶을 살지 묻는 수많은 질문 속에 있겠죠.


12 31일에서 1 1일은 단지 하루가 지나가는 것뿐인데

그 하루에 우리는 1년을 다 담으려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 질문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아지기에

가벼운 질문으로 인생을 담으려고 하기에

그 무게가 더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삶이란 그렇게 녹녹지 않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짙게 느껴지고,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 양손 가득 무언가를 쥐고서

다른 어떤 것을 차지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네요.


김종환의 노래 중에 '존재의 이유'라는 곡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늘 그 길을 택하고 싶다."라는 가사가 있는데

저 역시 그런 길을 선택하고 싶네요.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이 여행의 길은 상당히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여행의 끝에도 그 행복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의문이네요.


저에게 새해는 상당히 큰 부담인데 당신은 어떤가요?

저는 한 해가 너무 부담스럽기에

부담의 한 해가 아니라 행복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제 올해 계획은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고,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도 실컷 볼 거예요.

또 여러 취미를 갖고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려고 합니다.


성탄 카드를 보내면서 너무 혼자만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 카드는 불가리아 소피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어려운 아동들을 위해

기부된다고 해서 구매한 카드입니다.

여기에 그려진 그림도 그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죠.


대충 그려놓은 듯한 이 카드의 그림은 어떤 아이가 정성스럽게 그린 작품이죠.

우리의 인생도 남들이 보기에는 대충 그린 낙서인 듯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만큼은 공 들여 그린 예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 같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전 20화 우울함의 소중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