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MI Oct 12. 2021

여행을 하다 보면 꿈과 같은 하루가 있어.

   나는 이제 터키 이스탄불을 지나서 동유럽으로 들어간다. 여행의 속도는 익숙해졌지만, 나의 여행이 고조되고 변형되어  때마다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같은 하늘을 만나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져버릴  같은 사람처럼 시무룩해질 뿐이었다. 내가 선택한 유럽의  도시는 불가리아 소피아였다. 분명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북쩍임이 없는  정적인 도시는 잿빛 하늘로 가득했다. 거리는 조용했고, 도시는 차분했다. 신나는 파티의 함성도, 경쾌한 음악의 사운드도 들려오지 않는 곳이다. 웃고 드는 소리마저 시멘트 같은 하늘에 흡음되어버렸나 보다. 발칸 유럽의 겨울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체크인을 앞둔 호스텔 로비에 앉아서 홀로 멍하니 있을 때 익숙한 언어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어였다. 반가운 모국어 소리에 고개를 재빨리 소리의 방향으로 돌렸다. 인도 코치에서부터 여기에 오기까지 거의 한 달 가까이 한국어를 들어보지 못했다.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혼잣 말을 하게 만들었고, 들려오는 한국어 소리에 목이 꺾일 정도로 돌아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특히나 겨울 시즌에 불가리아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단아한 여성 여행자 두 분이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내뱉은 첫마디는 "한국인이세요?"였다. 마치 조난당한 사람처럼, 피난 중인 사람처럼 툭하니 말을 던졌다. 단아한 두 여성 여행자들의 눈은 당황했으며 경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몰골은 인도 여행의 흔적이 그대로 있는 거지꼴이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와 이동 중 편해서 입은 알라딘을 연상시키는 인도풍 바지, 거기에 어울리지 않은 패딩을 입고 90L의 배낭을 짊어진 나는 노숙자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나 말고 다른 거지꼴을 한 청년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한국인이세요?" 엄청난 동질감이었다.

 

   가끔 보면 그런 여행자들이 있지 않은가? 같은 나라 사람들을 피해서 여행하는 사람들 말이다.  역시  부류 중의 하나였다. 온몸으로 온전히 타국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도 있고, 한국 사람들이 여행을 잘하지 않는 지역을 다닌 이유도 있다.  저렴한 숙소만 이용하다 보니 한인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전혀 이용하지 않은 점도 있다. 사실 터키에 있을  잠깐 한국인들과 스쳐 지나가듯 만나기는 했었다. 그들과는 간단한 대화 외에는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같은 여행자라는 동질감도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특히 거지꼴을  청년은 표정은 순박했고 대화에는 적극적이었다. 1 넘게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의 여행에 확신이 있었으며 행동하는데 진취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차를 빌려서 도시 외각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얼마 만에 대화의 불편함이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 동행인가? 너무나 당연스럽게 승낙하였다. 솔직히 그가 한국인이 아니었어도 그의 여행가적 에너지에 이끌려 기뻐하며 함께했을 것이다.


   우리는 소피아 시내를 벗어나 시골 도로를 달렸다. 도시보다 더 짙은 쓸쓸함이 찬바람과 함께 가슴으로 불어왔다. 작은 마을을 만날 때마다 그 농도는 더 진해졌다. 사람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시골 마을에서는 몽환적이고 신비함마저 짙게 풍겨왔다. 마치 꿈속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계속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동굴이었다.

   사람이 없다. 관람객도 관리인도 없었다. 오로지 그와 나뿐이었다. 좁게 나이 있는 숲 언저리의 길을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보니 분명 최근까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우리 밖에 없다. 동굴 안쪽 끝에 다 달았을 때 천장에 큰 구멍 두 개가 나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밖의 빛이 동굴 안으로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청년은 사진기를 꺼내고, 삼각대를 폈다. 그리고 조심히 셔터를 눌렀다. 다시 자리를 옮기고 삼각대를 펼쳤다. 그리고 조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는 돌아다니며 연신 셔터를 눌렀고, 그 셔터음은 내 귓가에서 터졌다.


   동굴 탐험은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소비시켰고, 배고프기에 충분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을 살펴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숲과 산뿐이었다. 1시간 정도 차로 가야 나오는 맥도널드가 가장 가까운 식당이었다. 주저 없이 차를 몰았다. 그는 함께 하면서 갈 수 있는 식당이 현지 식당도 아니고 맥도널드인 것에 미안했는지 자신은 전 세계 맥도널드를 가보고 그 나라만의 시그니처 메뉴를 먹어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말에 공감했고, 공감하는 만큼 여행의 이야기는 깊어져 갔다. 각자의 여행의 대화를 끊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울 때,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굽이치는 강을 따라 큰 성곽이 보였다. 유명한 요새 도시인 "벨라 코터르 노보"였다. 그저 배가 고파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식당을 선택한 건데 그 허둥거렸던 선택이 뜻밖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동유럽 여행을 결정하고 상당히 불안했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선택이었고, 계획의 변경이었다. 나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누구나 다 아는 발칸 국가들의 기본적인 역사 정보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유명한지, 어디를 여행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의 수박 겉 핡기식 얕은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터넷을 통해 인류 문명의 훌륭함을 느끼며 많은 사람들이 모아 놓은 정보들을 손가락 하나로 쉽게 주워 담았지만 그 정보의 깊이는 내 손가락만큼이나 짧을 뿐이었다. 이런 것들은 나를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중 눈앞에 거짓말처럼 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꿈처럼.








이전 18화 기대하지 않은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