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와 윤치호, 애국가의 진실은 무엇일까"

3.1절 101주년, 해방 75주년에 찾아가보는 애국가에 대한 미스테리

by 이영일

지난 3월초 SBS 뉴스는 ‘끝까지 판다“편을 통해 애국가 작곡자로 알려진 안익태 선생의 친일논란을 연이어 방송했습니다.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장에서 직접 작곡한 일본 궁중음악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사람이 안익태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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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직후 안익태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서 "몇 년 전 한국 사람이라며 자신의 음악을 소개했는데 요즘은 일본 사람이라고 말해 조금 당황스럽다"라는 기록도 나왔습니다.


안익태는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라는 주장도 제기된 상태고 심지어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는 실정입니다.


지난 3월 8일에는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28회를 통해 안창호 선생의 사진 3장이 소개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를 찾은 연예인들이 안창호 선생의 참혹한 사진을 소개한 예능 프로였는데요,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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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101년전 이 땅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분개한 온 민초가 분연히 일어나 자주독립을 목놓아 외치며 흔드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해방의 열망이 도미노처럼 온 나라를 휩쓸었던 그날, 독립의 갈망이 가슴 벅차게 물결치던 그 백성들의 가슴에는 절절한 애국의 노래도 흐르고 있었죠.


바로 애국가입니다.


애국가의 진짜 작사자는 누구일까.


애국가는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일제의 찬탈과 갖은 탄압속에서 죽어간 순국 선열들과 백성들의 한이 서렸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먼저 간 고운 이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의 소야곡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곱고 절절한 애국가의 지은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고 이제는 애국가 작곡자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마저 부각되는 형국입니다.


일단 작곡자가 친일파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확실한 건 누구인지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누가 가사를 지었는지는 규명되지 않고 '윤치호'설과 '안창호'설로 압축, 치열한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국가는 과연 누가 지었을까요? 한평생 애국적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순국한 안창호일까요, 자발적 친일 거두의 삶을 살다 일본의 귀족이 된 매국자 윤치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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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매국의 거두, 일본 귀족 이도오 찌꼬오(伊東致昊) '윤치호'의 애국가.


윤치호는 10대 청소년 시기에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청년이 되어 중국에서 근대 교육을, 미국에서 신학과 인문사회,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영어에 능통한 수재중의 수재였습니다. 청소년기때부터 신문물과 신학문을 접하며 근대화된 일본을 동경했고 조선을 낙후된 사회라 비판했던거죠.


일본을 동경했지만 청년 윤치호는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도 했습니다. 대성학교 교장도 역임한 그였지만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한 이후로는 자발적으로,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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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이 일선동화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3.1운동이 일어난지 며칠후 <경성일보>를 통해 평화를 위해 일제에 순종하라는 매국적 발언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강제병합이 숙명이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일제신민론(日帝臣民論)을 주장했고 3.1운동후에는 조선독립불능론을 주장했던 것이 그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의 친일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1943년 일제의 총동원령이 나오자 11월 18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 학도병 독려의 적극적 친일행위에 열을 올린 윤치호는 1945년 2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어 일본 귀족 '이도오 찌꼬오(伊東致昊)'가 됩니다.


자신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똘똥 뭉쳐 있던 그는 자발적 매국노의 거두가 되어 있던 것입니다.


주목할만한 점도 하나 있습니다. 그는 평생 영어로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는 사소한 금전출납 내용과 아주 시시콜콜한 얘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꼼꼼하다 못해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적었던 그의 일기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그의 일기장에는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도 없습니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 뜬금없이 애국가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나섭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좀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평소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없는 윤치호. 해방후에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했음에도 60년 일기중에는 한줄도 이런 내용이 없지만 그가 지었다는 찬미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애국가에 작사자라며 그의 이름이 적힌 자료가 나오고 있습니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대표적 입장은 윤치호 역술 1908년 재판 <찬미가> 기록,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티(치)호 기록, 1910년 8월 14일 동격유학생회 韓國開國紀元祝賀會 "金晋庸ヨリ現行ノ國歌ヲ廢シ尹致昊作ナル國歌ニ代ヘンコトヲ提言" 기록, 1945년 자필 '1907년 윤치호 작' 기록, 가족의 다양한 증언들이 그것입니다.


평생 혹독한 탄압과 애국의 한 길을 걸어간 '안창호'의 애국가.


애국의 표상이자 일제로부터의 혹독한 고문과 탄압을 받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안창호의 삶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고,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니라는 주장은 지금까지 그 스스로가 자신이 애국가을 지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 2015년 3월의 주장을 저는 기억합니다.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새로운 증언이 나왔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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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안창호가 선천예배당에서 애국찬미가 시상을 착상했고 이 대화를 나눈 사람인 윤형관 집사의 막내 동생인 윤형갑의 종손 윤정경이 전언되어 채록된 자료를 공개한 것인데, 애국가에 등장하는 무궁화는 근화(槿花)라는 식물(植物)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무궁(無窮)한 억조(億兆)창생(蒼生)을 지칭하기 위해 안창호 선생이 창작한 낱말이라고 안창호 선생이 직접 말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애국가가 민중의 노래가 되기 위해 인쇄물이 아닌 구두로 이를 전파했고 임시정부내에서도 독립운동 세력간 다툼이 있어 ‘나(안창호)의 작품으로 얘기하는 것이 부작용이 있을 것이니 내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도 그 당시 나온 증언이었습니다.


2013년에 타계한 독립운동가 구익균 옹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동아일보(2011.10.25.)와의 대담을 통해 애국가 지은이가 누구냐 묻자 웃으시며 "내가 지었다"고 말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겁니다.


이 외에도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무궁화가가 안창호과 관여되어 있다는 주장, 주요한의 <안도산전서>에서 애국가 원래 끝 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친일파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에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안창호가 수정했고 결국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 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안창호설'에 대한 믿음보다 ‘윤치호설’의 의심이 가시지 않는 이유.


안창호는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하지 않았다는데도 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증언은 계속 제기되어 왔고, 이제는 하나둘씩 안창호 스스로 내가 지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습니다. 윤치호는 자신이 지었다고도 했고 그가 지었다고 기록된 자료도 다수 존재하지만 윤치호가 애국가의 지은이라고 선뜻 수용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마저도 시큰둥한 반응입니다.

untitled_4_282342547574.jpg ▲ 지난 2016년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안창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추청된다며 공개한 무궁화가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은 자라면 안창호가 가삿말을 자의적으로 바꿔 임시정부에서 부르는데 이미 그당시 친일 매국의 영화로운 길을 걷던 그는 왜 이를 문제삼지 않았을까요?


물론, 윤치호가 악질 친일 매국노라고 해서 그가 애국가를 작사했을 능력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윤치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적의 사상을 가진 그가 변절 전에 어떻게든 애국가의 형성 과정에 관여했을 수는 있을 듯 싶습니다.


작사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60년동안 단 한번도 스스로 애국가에 대해 언급없던 자가 애국가를 만들었다고 해방후에 본인 스스로 떠들고 다니면서 이후 기록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무언가 찜찜하다는 거죠.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계속되는 미스터리, 진실은 무엇일까.


1920년 3월 1일, 상해에서 열린 제1회 3.1절 기념식에서 '3.1정신을 잊지말고 영원히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였던 안창호가 과연 애국가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누가 지었거나 말거나 그냥 빙그레 웃으며 흐지부지 모른 척했으므로 애국가 지은이가 아니라는 윤치호측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1919년 3월 1일 직후 약자는 강자에게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조선독립불능론을 주장한 윤치호가 애국가 지은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일까요?


윤치호든 안창호든 누가 애국가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아직 확정된 바 없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해방된 지 75년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직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규명도 못하고 이젠 애국가 작곡자도 친일파라고 나오고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애국가의 작사자에 대한 계속되는 미스터리는 언제 끝이 날까요. 애국가의 지은이는 단순한 기록물 여부가 아니라 당시의 여러 정황과 역사적 상황에 바탕해 반드시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질곡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엄중한 책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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