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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Cafe 하나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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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니 Oct 29. 2022

그들 아닌 우리

째애애액, 째애애액, 째애애액.”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을 바르고 적당히 마른 작지 않은 키의 선생님과 아이들 여럿이 둥그러니 모여 있다. 재미난 싸움 구경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겹의 띠는 조금 떨어져 있는 나에겐 무슨 일이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가까이 가 대부분이 초등학생인 아이들 너머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싸움을 본다. 아이들의 싸움을 기대하였지만 쉬이 싸움의 대상을 찾지 못했다. 하기나 아이들의 싸움을 선생님이 바라만 보고 계실리는 없다.


줌 거리도 안 되는 작은 새가 하늘을 삼킬 기세다. 손가락 한 마디 만하던 두 어깨는 갑 바를 한껏 올린 모양 새로 하늘을 인다. 조동이를 앞으로, 고개가 빠질 새라 ,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동동 발도 구르는데, 모인 아이들을 잡아먹겠다는 것 같다. 거대한 산 같을 법한 이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그 새는 한 자리에서 구르거나 잠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기는 하나 자리를 떠나지는 못한다. 가만 보아하니 그 아래 수많은 자갈과 섞인 알을 지키는 모양 새다. 참으로 연약하고 여린 새가 둥지로 고른 곳은 낮에 해를 받아 할머니의 군불에 달구어진 아랫목처럼 따스해진 자갈 사이였다. 더군다나 세상 풍파에 다 듦 어진 자갈과 어미의 사랑에 둥글어진 알이 구분도 잘 되지 않는다. 난리를 피우는 어미 탓에 가까이 가서 알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곳이 그 작디작은 자신의 분신을 숨기기에 좋은 곳임을 그녀도 아는 것이다. 오가는이 적은 학교 운동장 한편의 놀이터 구석, 그녀는 완벽한 장소라 여겼을 것이다. 허나 주말 동안 한가 했었을 그곳은 시간이 가면 성난 너울처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것 까지는 알지는 못했으리라. 어쩌다 숲이 아닌 마을 한 구석을 택한 것인지 안타까웠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교실로 들어가게 했다. 나도 아이를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그 새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른다. 허나 다음 날 그 싸움을 다시 보지는 못 하였으니 누군가의 배려로 그들의 삶을 이어갔는지 조차 모른다. 나도 나의 삶을 사느라 애써 알아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소위 ‘내 손 안의 세상’이라는 핸드폰을 통해 전해진 브라질 해변의 사진 한 장이 몇 년 전 힘겨운 싸움을 하던 어미를 생각나게 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수많은 작은 거북이들의 사진이었다. 그들의 어미는 종족을 이어갈 작은 알을 과거보다 쉬이 자리 잡고 세상에 놓았으며 그들의 희망은 다른 때 보다 많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멸종 위기라던 거북이들이 겨우 겨우 이어가던 그들의 생존을, 인간의 방해가 사라진 곳에서 조금 쉽게, 좀 더 많이, 그들의 삶을 시작했다. 또 백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해서 책에서나 볼 수 있던 거대한 혹등고래가 바다를 유영하는 사진도 전해졌다. 크기를 짐작해 볼 뿐이었던 경이로운 광경을 영상을 통해 보니 배 보다도 큰 그 거대함이란 그저 우리의 미미함을 깨닫게 한다. 그뿐인가 인도의 한 마을에서는 영원할 거 같았던 희뿌연 먼지 안개가 걷히고 히말라야 산이 보였다 한다. 코요테나 사슴들이 학생들이 떠난 캠퍼스를 거니는 사진도 전해졌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리 없이 세상을 뒤흔드는 동안 두려움으로 반 강제 칩거에 들어간 터에 인간의 방해를 받지 않은 자연이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는 소식들이다.

광역 도시 주변에 사는 나는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동물이나 심지어 거위들이 차도를 건너기 위해 부지런히 눈치 보는 것을 자주 보는데, 어린 시절 빌딩에 둘러싸인 대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터라 신기하게 봤었다. 또 뉴스에서는 멧돼지들이 마을을 쑥대 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도 가끔 나온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그저 남이 지어놓은 곳에 살았던 나는 그들이 왜 나의 터전에 찾아오는지를 전에는 몰랐었다. 사실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그들이 살던 터전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우리 동네도 도시의 확장에 따라 숲이었던 곳들에 건축 중인 아파트나 주택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근처 숲에 살던 부엉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아직 숲이 개발되기 전에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숲을 지나가야 했다. 또 그 숲은 그의 놀이터였다. 그를 찾으러 간 어느 날은 분명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없어 보였는데, 알고 보니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놀고 있었다. 그랬던 그곳은 또 다른 주택단지가 되었다. 내겐 비가 오면 진탕이 되고 조금은 무서웠던 숲이 말끔히 정리되어 난 좋았다. 그런데 아들은 그리웠는지 그 숲에 있던 부엉이 이야기를 했다. 부엉이가 있었다고 누구는 코요테도 봤다 했다. 나 살기 바빠 그저 그렇게 또 잊었다. 그런데 그들은 쫓겨난 것이었다. 그들이 피해자였던 것이다.


인간에게 퍼진 각종 신종 유행병들 중에는 동물들이 매개체가 되어 우리에게 오고 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도 박쥐가 매개가 되어 우리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한 것이라 한다. 그들이 살던 터전인 숲을 인간이 빼앗고 심지어 먹이로 삼기 위해 포획하는 우리가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 한다. 그들의 터전에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우리들이다. 위풍당당 거대한 침입자가 되어 그들의 영역을 빼앗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그들의 자리를 빼앗고 짓밟아 왔다 자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질병이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에게 심각한 위기가 되어 운신을 못하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물론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나 나도 좀 더 여유로운 삶과 자연을 영유하고 싶어 도시를 벗어나 터전을 잡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의 욕심이 건설업자를 움직었을 것이다. 그러니 발을 뺄 수 없다. 이렇게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다.


터널의 끝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키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 없다. 그저 아직은 주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이 없기에 다행이라고 치부한다. 그저 먼저 피해를 본 이들을 안타까이 볼 수밖에 없다. 병원 현장에선 또 다른 혈전이 치러지고 있으리라.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을 뿐 질병관리본부나 정부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


밖으로 운신하지 못하니 미루고 미루던 집안일을 하게 되고 바쁘단 핑계로 서로의 소식 한 줄 알지 못했던 동창들의 소식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마주한다. 내가 움직인 만큼이나 다양하게 자리를 잡은 그들의 소식을 접한다. 싱가포르, 알프스, 뉴욕, 베를린,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 마주하는 이번 대 유행의 모습을 전한다. 한 줄 없던 그들의 소식을 마주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저 한 동네 한 교실에서 한 시절울 보내며 나눈 기억으로 남아있던 그들의 소식을 지구 한 구석에서 보내는 일상으로 대체한다. 비행기로도 두세 나절 정도 걸릴 거리의 친구들이 소식을 전하는 순간,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갔으며 무엇을 먹거나 입었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기술의 혜택인가 보다.


나는 오늘도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또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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