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우리가 자신을 모르는 이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그림이 하나 있었다. 작업 당시 야근이 잦아 일부러 회사 근처로 잡았던 지하 공용 작업실에서 거의 화풀이하듯 그렸던 그림이었다. 완전히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어두웠던 그 시절의 기록이니까 가지고 있는 게 좋겠다 싶어 한 5 년 동안은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들고 다녔다.
상황이 조금 나아져 신축 건물 상가로 이사한 지 1 년이 되었을 때, ‘볼 때마다 기분 나쁜 과거의 조각을 굳이 왜 가지고 다녀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음습하기 그지없는 지하에서 나와 이렇게 밝은 곳으로 올라왔는데 말이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다 마시고 씻어 둔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컵에 서둘러 봄을 닮은 연노랑을 가득 풀었다. 그리고 그때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크기의 캔버스를 눕힌 후, 문제의 그림을 덧대어 올렸다.
넉넉히 푼 물감을 망친 그림 정중앙에 붓자, 연노랑 파도가 가장자리까지 일었다. 희고 깨끗한 바깥쪽 캔버스까지 노란 배경을 만든 후, 초록과 파랑, 금빛이 깃든 커다란 강을 냈다. 그러자 어둠은 이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 속에 남아 있던 질감이 새로운 물감을 덧입으며 더욱 솟구치듯 살아났다. 매끈한 흰 캔버스만으로는 금세 낼 수 없는 질감을 이미 지니고 있으니, 오래 붙들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로 ‘Reborn’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작품은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한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다. 덕분에 난생처음 로펌 계약을 하고, 살면서 당한 가장 부당한 일에 대한 이의제기도 법적 절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새로 태어난 이후에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지만, 결국에는 이 그림을 닮은 밝고 따뜻한 부부의 댁으로 가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힘들었던 기억을 모두 지운 채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삶의 파고를 가늠할 수 있는 현재의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인생의 고비들을 그저 괴로워하며 보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리어 도장 깨기를 하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음 장을 무슨 색으로 채울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해 보니 다시 태어날 필요까지는 없겠다. 지금도 매일 다시 태어나는 중이니까. 매일매일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