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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Sep 20. 2024

완벽한 이방인으로

2장 - 우연과 인연이 스민 거울 앞으로


 날 때부터 익숙한 이 사회의 흐름대로 살다 보면, 문득 내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처럼, 어느덧 밖에서 주입한 무언가가 채워지고, 나이에 맞는 라벨이 부착되고, 뚜껑이 닫히고, 곧이어 상자에 실리는 예정된 수순을 밟으며 끊임없이 ‘그다음, 다음은 언제지?’를 마음속으로 외친다. 속도 제어가 되지 않는 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잠시 벗어나 완벽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까?


 4학년인 주제에 ‘학사 졸업’이라는 라벨이 붙기 전 용감하게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 떠났던 캔버라에서의 한 학기. 내 전공인 시각디자인과 완벽히 대치되는 과가 없어 ‘판화 & 드로잉’ 과로 배정이 되었다. 대외적 명분상으로는 이전에 배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기간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건 내 자아를 고요 속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졌다 돌아와 ‘간밤에 내 닭이 무슨 알을 낳았나?’ 하고 지푸라기를 헤집어보는 어린 주인이 되는 어떤 놀이의 반복이었다.

 전공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빡빡한 학교생활에 비하면 수업도 과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밀려오던 모든 압박이 순간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 해 내게 주어진 것은, 내가 누워도 위아래가 남을 만큼 커다란 작업 책상과 큰 종이를 넣기에 넉넉한 서랍, 소란스럽지 않으며 협조적인 열다섯 명의 수업 동기들이었다.

 헝클어진 긴 곱슬머리에 깡마른 체구를 한 4차원 베이야드, 수다쟁이 같은 쨍한 목소리 톤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 수다스럽지 않은 친절한 냇(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학기를 마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작업 욕심이 대단하고 쾌활한 호주 아줌마 가비, 만삭의 몸을 이끌고 학구열을 불태운 젊은 금발 엄마 케이티,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 같은 투박한 인상에 그와 똑 닮은 거친 목탄 작업을 하는 아저씨 케빈, 황혼기를 배움으로 보내고 있는 체력 좋은 할머니 베티, 그리고 그네들의 카리스마 때문에 제대로 통성명해 보지 못한 몇몇 친구들까지.

 각각의 극명한 개성으로 이미 철옹성을 쌓아 올린 예비 작가들인지라 누가 더 가깝고 누가 더 멀고 할 것이 없었다. 모두 개인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아주 드물게 서로 맞물리는 접점이 생길 때 가벼운 수다를 함께하는 정도가 전부였고, 그게 참 편했다.

 교환 학생과 함께 수업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메인 교수 사샤와 그녀의 학생들은 나를 대할 때마다 당황하는 눈치였다. 교환 학생에게 학교 차원에서 제공되는 재료가 무엇인지, 별도의 수업을 할 경우 행정상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등의 사항을 아무도 알지 못해서 수업 시간 중에 내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으레 이런 식이다.

 “교환 학생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부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과정 중 괜히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아 당황한 적도 많았지만, 공인된 자투리 시간을 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호주에서 행정 처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교통편이 촘촘히 배치되지 않은 도시인지라 차를 가진 친구와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미술관 현장 수업 정도는 그대로, 가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에 대한 불이익도 딱히 없었고, 빠지면 빠지는 대로 마음껏 개인 작업을 하면 그만이었다. 가도 좋지만 가지 않으면 더 좋은 상황. 그래도 국립 미술관의 비공개 자료들을 큐레이터의 감독 아래 마음대로 들춰보고 만져볼 수 있다는 건 학생으로서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갈 수 있는 만큼은 꼭 챙겨 갔다. 그 외엔 웬만하면 남겨진 시간의 대부분을 학교 작업실에서 보내곤 했다.

 넓고 검은 책상 위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다 담기지 못해 흘러내리는 광경.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캔버라의 풍경이다. 학교라는 공간에 이토록 기대어 있으면서도 내가 ‘놀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외부적으로 다가오는 압박, 혹은 자극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 없이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혹시 있을지 모를 영감의 물줄기를 찾아 헤맸다.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은 작업. 그러나 이를 외면할 시에 닥쳐올 것은, 내 힘으론 견딜 방도가 없는 그런 유의 권태였다.


 땅이 넓은 탓인지 이 도시엔 유난히 의미 없이 방치된 공터가 많았는데, 그곳을 가로지를 때마다 마치 나의 위치와 심리상태를 가시화한 그래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불안함보다는 담담함으로, 컨베이어 벨트 바깥을 하염없이 걸었다.

 한국이었다면 가능했을까? 포부로 가득했던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마침내는 텅 빈 곳에 찍는 것. 취업, 졸업, 성적, 그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일 말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보니,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각고의 노력을 쏟아야 쟁취할 수 있는 공통의 목표. 그 좁은 구멍이 뚫린 안대가 스르르 벗겨진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 위 고만고만한 학생들 사이에서 좀 더 멋져 보이고 싶어 엉거주춤하게 ‘시각디자인’ 라벨을 선택했던 그때처럼, 그건 내가 진짜 원하던 게 아니었다.


 완벽한 이방인으로 한 시절을 살아보면, 비로소 선택권이 나에게 넘어온다. 컨베이어 벨트에 다시 오르기 전 숨을 고르든, 아예 벗어날 결심을 하든, 그 선택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알 수 없는 무력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차릴 기회는 언제나 본류 바깥, 느린 유속의 여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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