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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y 29. 2018

하루 중에 우리가 성장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풍경들



노르웨이 로포텐 섬의 축구장. 비현실적일만큼 아름다운 축구장이다!


   남북으로 뻗어있는 노르웨이. 그곳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로포텐 섬이 있다. 바위섬을 깎아 만든 축구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대서양을 바라보며 푸른 잔디 위에서 새 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로포텐 사람들은 공을 찬다. 축구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을 정도다.


  로포텐 섬의 발스타드는 어부들이 모여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3대째 어부로 살고 있는 뵈르겐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뵈르겐 씨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낚시하는 모습 마저 그저 아름답다 감탄하고 있었는데, 그가 낚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후가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친 몸으로 일단 테라스에 나갔다. 그의 집 테라스에서는 뾰족한 바위산과 울퉁불퉁한 해안선이 한 눈에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케이크와 차를 마시는데, 매일 일이 끝난 후면, 그렇게 그 자리에서 자기의 소중한 티타임을 즐긴다고 했다. 마치 하루의 중요한 일과처럼 말이다. 그 장면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일을 마치고 내가 쉬는 모습하고는 영 달라서인데, 단순히 그가 노르웨이의 풍경 속에서 살기 때문은 아니다. 일을 마치고 아무것도 할 힘이 없이 널부러져 있는 것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서 가장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쉬는 모습은 완전히 다른 거니까 말이다.






  며칠 전, 저녁까지 서점에 있다가 종각역 근처에서 과일 주스를 하나 샀다. 음료를 들고 버스를 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청계천 가를 가만히 걸었다. 어둑어둑한 시간에 천 위에 색색깔 연등이 달려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높이 걸어놓은 연등이 검은 물 위에 반사되어 선명하게 흔들렸다. 마치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것처럼 예뻤다.



다리 위 여기저기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저 물위의 연등을 보고 있었구나. 나도 그렇게 가만히 청계천을 내려다봤는데, 이렇게 가만히 청계천 앞에 서 있는 일이 꽤 낯설었다. 항상 청계천 가는 바쁜 걸음으로 지나쳤고,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휴대폰을 하며 서 있던 곳이지 ‘아무 목적없이’ 가만히 서 있던 적이 없었다.


목을 빼꼼 내밀고 청계천 다리 위에 옹기종기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흡사 여행지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일본에 오타루 운하에서도 오늘과 비슷한 풍경을 봤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동네 골목골목 돌아다닐 때마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작은 개천 하나 나올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봤다.


왜 일상도 여행처럼 설렐 수 없을까. 우리 동네 산책이 여행같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행지와 일상에서 내 행동부터가 너무나 달랐다. 잠깐 걸음을 멈추니 이전까지 보이지 않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뵈르겐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문득 그날 본 청계천 연등이 떠올랐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아보카도에서 싹이 삐죽 올라왔다. 눈에 띄게 자라는 녀석 :-D


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하루 중 어느 순간에 성장하는 걸까?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씻고 부랴부랴 달려나갔다. 불광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버스에선 휘청휘청 졸았다. 미팅을 한답시고 계속 불려다니고, 해야할 일 리스트를 지우는 데 급급해서 하루에 틈새가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고, 수건이 업어 빨래까지 하고 나니, 왜때문에 저녁 10시죠. 소파 앞에 널부러지고 만다.


해야할 일 틈새에서 간신히 달리니까, 일을 마친 후에 넉다운 할 수 밖에 없겠지. 좀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퇴사를 했는데, 어느 순간 직장 생활 할 때보다 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구나 싶다. 직장이 없다는 아주 약간의 불안과 시간이 아깝다는 조바심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다.


가만히 산책을 할 때, 여유롭게 샤워를 할 때, 재미있는 생각들이 자주 떠올랐다. 일들이 차분히 정리된 경험을 했다. 좋은 영화나 책을 다 보고, 잠시 혼자 생각에 잠길 때, 작품의 감동을 새삼 느끼곤 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쉼표를 찍는 순간에 나는 생각을 다지고, 스스로 차올랐다.


그때가 바로 내가 손톱만큼씩 자라는 순간이 아닐까. 마치 뵈르겐 씨의 소중한 티타임 같은 순간 말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책상에 스탠드 하나 켜고 가만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순간도 그렇다.


뵈르겐 씨가 어부이면서도, 일하지 않을 땐 집을 짓는 목수가 되고, 정치 모임도 나갈 수 있는 동력은 매일의 티타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힘 빼는 순간, 비로소 차오를 수 있을테니.

뵈르겐씨의 티타임을 기억해야겠다.




# 널부러져 있는 시간 말고

# 진짜 쉼의 시간

# 일상으로 지니고 싶은 고요한 티타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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