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10개가 꿈이었던 그 소녀는...
Q: 안녕하세요. 저는 중2 스밀라입니다. 제 고민은 장래희망을 정할 수 없어서 고민입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무엇을 장래희망으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작가도 되고 싶고, 영화감독도 되고 싶고, UN에서도 일하고 싶고... 제 꿈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A: 그랬다가는 당신은 아마 작가도, 영화감독도, UN 직원도 되지 못할 겁니다.
지금은 성추행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모 기관장이 한때 상담 커뮤니티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 커뮤니티에 고민을 올렸다가, 이런 가혹한 답변을 받았다. (물론 얼토당토 않은 질문이지만, 아니 너무 무성의한 답변 아닌가!)
만약 누가 지금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일을 직업이 아니라 업무의 개념으로 나눠서 생각해보라고 조언했을 거다. 작가 말고 글쓰기, 영화감독 말고 촬영하기 등등. 이렇게 분류해서, 어떤 일을 꾸준히, 좀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라고 말이다.
일찍부터 나는 N잡러 기질이 다분했다. 학창시절부터 '평생 직업'이라는 말에 의문이 많았다. 사람이 보통 80년은 산다는데 어떻게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 살 수가 있지? 이왕이면 나는 10년 주기로 직업을 바꾸며 살았으면 좋겠다! 직업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흑흑)
어떤 사람은 내가 그런 성질을 타고났다고도 했다. 한때 동양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명리학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내 사주에 나무가 많아서, 끊임없이 뻗쳐나가려고 한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에너지도 끓어오르는데, 일을 마무리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운명의 지도라고 일컽는 사주를 스스로 들여다보고서, 나름대로의 구직의 원칙을 세웠다.
1. 매일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을 고른다.
2. 쉽게 그만두지 않는다.
첫 번째 원칙에 해당되는 직업은 딱 기자였다. 책, 공연 쪽의 기사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하는 일이 그랬다. 내 일터엔 늘 새로운 텍스트와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내 안에 무언가 축적되는 것이 느껴졌다.
촬영 기자로 일했던 최근의 일터에서의 생활도 그랬다. 회사로 출근했지만 매일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했고, 지방으로 출장도 자주 다녔다. 누군가는 ‘매일 그렇게 이동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내게는 가장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 날들이 기쁘고 즐거웠던 건 새롭고 낯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직업적 가치 중에서 자율성을 가장 중요시여긴다.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일할 때 가장 능률이 좋다. 기자라는 직업이 내게 그런 자율성을 보장해줬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작업들이 즐거웠다. 두 회사 모두 결국 같은 이유로 퇴사했다. 자율성과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신중에 신중을 더해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 글 쓰는 게 직업이던 시절, 칼럼을 모아 내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나는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할 줄 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스타트업 프로젝트에 합류해 새 일을 준비하고 있다. 잘 되진 않고 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사보나 웹진에 원고도 쓰고 종종 영상 강의도 한다.
그래. 나쁘지 않다, 싶다가도 가끔 밤마다 이불킥을 할 때가 있다.
어째서 내 커리어는 이렇게 제멋대로인가.
어째서 폭망인가 외치며...
그렇다. 학창시절 꿈(?)을 이루고야 만 것이다. 5년마다 업종을 바꾸었더니, 5년마다 신입이 된다. 늘 최선을 다하지만 늘 처음이다. 이 놀라운 굴레! 지금도 초짜 스타트업 플레이어가 되어 매일매일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꾸역꾸역 경력을 쌓아 내노라하는 무엇이 되지 않고, 어째서 자꾸 가지치기를 하며 새사람이 되는 것일까. 하아... 서른 중반이면 뭐라도 어렴풋이 되어있을 줄 알았건만!
하지만 이게 나라는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시작하면 5년은 어떻게든 열심히 하니까. 이제껏 해왔던 글 쓰기, 영상 작업 모두 여전히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다. 다만 언론사의 필요이상 수직적이었던 업무 환경이 나에게 좀체 매력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일했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결과가 좋아도 서로 피드백 없이 ‘수고했다’ 하고 넘어갔다. (서로 바빠서 혹은 무심해서.) 가끔 의견을 전하면, 그게 소란이 되었다. 권한과 책임이 없으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때우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퇴사에는 미련이 없다. (하지만 조금더 때울걸 그랬ㅇ...)
하지만 독립 창작러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으니, 이제 나의 활동에도 나름의 서사가 필요하다. 이제 내 일은 내가 온전히 관리해야 하니까 내가 고민하는 것, 생각하는 것, 하고 있는 것을 면밀히 기록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다 싶어서 기록을 시작한다. 글쓰기야 말로 내가 꾸준히 오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오호. 그러고보니 어린 시절에 꿈을 나름대로 이룬 셈이긴 하다. 책을 출간했으니 작가가 되었고, 촬영 일을 하기 전에도 독립영화를 찍어서 감독님 소리도 들었으니까. (UN까지는 못갔지만...뭐 모를 일이다!)
이렇게 앞으로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만 쫓아 살다가는 서른 후반이 되어서도 ‘무엇’이 되지는 못하겠지OTL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하고, 쓰고, 배우는 게 나라면 그냥 무엇보다도 더욱더 나답고 싶다.
,라고 호탕하게 외쳐봤자 자기 전에 또 이불킥을 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독립 창작러로 막 시작을 했으니, 앞으로 3개월 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련다. 그리고 차곡차곡 기록해야지. 하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저요. 쓰고 찍고 만들고 다 합니다. 연륜은 덤입니다. 에너지 넘치는 인재가 필요하신 분들은 연락주세요. summer2277@naver.com
# 왜때문에 마무리는 구직광고...
# 뭐가 안되면 될때가지 해보지
# 글 쓸때만 샘솟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