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살 두리의 마지막 항해 - 최종회
두리는 1980년 5월 18일 일본 히타치 조선소에서 YARD NUMBER 4.642로 KEEL LAID 하며 태어났고, 그 해 10월 5일 물 위에 띄워진 후, 마지막 의장 작업 및 선박으로서의 단장을 마무리하며 1981년 1월 29일 선주에게 인계되어 M/V WORLD DULCE라는 첫 이름을 가진 CAPESIZE의 BULK로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화려한 생애를 시작했다.
두리는 태어나 지금까지,
M/V WORLD DULCE (PANAMA) 1987년 06/08까지
M/V DALTON (U.K) 1988년 07/24까지
M/V NAVALIS (HONG KONG, CHINA) 1997년 10/23까지
M/V CAPE OF GOOD HOPE (MALTA) 2004년 11/16까지
M/V GREAT GALAXY (KOREA) 2008년 10/04까지
M/V DURI (KOREA)
라는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개명해가며 나라가 다른 선주들과 살아왔지만, 그런 그녀의 생애에서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7925948이란 IMO NO. 뿐이다.
우리들에게 있는 주민등록 번호만큼이나 중요한 이 인식번호는 관련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배 이름에 앞서 입력해도 이력이 줄줄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는 번호인 것이다. 지난 2주일 여를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언제 바이어에게 배를 인계해주고 집으로 돌아갈까를 걱정하면서도 두리와의 마지막 인연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 그 안달 나는 나날을 힘겹지만 참아가며 지내게 했었다.
당장 어느 때라도 두리를 넘겨줄 준비를 다하고 있었지만 왜 그리 꼬이는 일이 많은지 계속 넘어가던 인도 일자의 늘어짐에 낙담하든 내 마음을 추슬러가며 다잡아 보던 내 구호는, -마지막까지 사고 없이 배를 넘겨주도록 하자-였다. 날씨도 괜찮아 보이는데 왜 항해당직으로 고생(?)시키냐는 식으로 물어오던 선원들의 불만이 짐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해이함이 바로 사고의 근원이 됨을 강조하며 달래곤 했었다.
마지막 날 밤까지 야간 지시록을 쓰고 또 서명을 받아 두었지만, 오늘 아침 그 책은 세상에서 고의로 없애버리려 불살라 버린 서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의 실마리를 최소한 사관들은 알아주었으면 바랐었고 또 내 그런 바람을 그들이 이해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은 배를 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 처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니까….
이번 항차 마지막을 장식할 날도 그렇게 밝아 왔다.
보통의 항차였다면 끝이 나도 다른 화물을 찾아가며 이어지는 그다음 번호를 가지게 되지만 두리의 이번 항차는 그게 그야말로 마지막이 되어 다시는 두리의 몇 항차라는 이어짐이 없이 VOY.003으로 끝이 난 것이다.
미리 감기 시작했던 닻이 다 올라왔다는 선수루 일항사의 보고를 비칭 마스터에게 알려준다.
-Slow Ahead Engine!
짤막한 엔진 오더로 며칠간 머물고 있던 치타공의 찰리 정박지를 드디어 떠나기 시작한다.
앞으로 두 시간여 생애를 마감하기 위한 곳을 찾아가는 두리의 최후 항해가 시작되었고 이제 너무나 간단히 마무리되어가는 과정 앞에 허탈과 허무가 교차하여 엄습해온다.
두리의 마지막 모습은 정박지에 투묘한 것 같은 모습이지만 앵카 두 개 모두 걷어진 상태로 기관이 저절로 서줄 때까지 전속력으로 들어와 그대로 뻘밭 위에 임의로 좌주(Agrounding)시켜 놓은 상태다. 이곳이 두리가 마지막 해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힘겹게 줄사다리를 타고 마지막 철수를 하며 대롱대롱 매달린 허공에서 까마득하니 내려다 보이던 통선은 쪽배라 하는 게 알맞으리라. 겨우 안착한 마구 흔들리는 통선에서 뻐근해진 팔을 주무르며 세 명이란 정원을 채우려 계속 내려오는 사람을 기다릴 때 사방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 본다.
이미 뻘밭에 바닥을 디디고 선 두리는 조가비가 덕지덕지 붙은 선체 하부를 내보이며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목을 젖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높아진 브리지는 어느새 선체에 가려져 시야에서 보이질 않으며 주갑판 현문 부근에서 하선 손가방들을 줄에 매어 내려주고 있는 곧이어 하선해야 할 선원들의 모습도 유난히 작아 보였다.
이윽고 통선이 떠난다.
건들거리는 베니스의 곤돌라 비슷한 모습의 통선이 엔진을 걸어서 움직인다. 그 통선만큼이나 사공(혼자 타고 있던 통선 선장)의 모습도 건들거리는데, 구관조 같은 발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흉내 내는 연기를 하며 말을 걸어오고 있다.
-대꾸하거나 말을 꺼내면 괜히 복잡하고 길어지니 모르는 체하고 있어요.
그의 걸어오는 말에 응대하려는 동승인들을 말렸다. 그와 말을 하게 될 경우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귀찮은 행동으로 이어질 게 뻔하므로 취한 내 방어적 생각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뻘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려 주는 해변가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며 관심을 보인다. 눈만은 반짝이는 이들은 우리를 쳐다보는 눈길이 움직이지도 않고 고정하고 있어 그 눈길에 잡힌 우리가 오히려 멈칫하는 마음이 된다.
대리점원이 나타나서 기다리고 있는 차로 안내해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곁눈질로 살펴보니 그들은 줄을 서서 기다란 로프를 함께 들고 무언가를 끌고 있었다. 예전 오래전에 보았던 이집트 피라미드 관련 영화가 불현듯 떠 오른다. 수많은 노예들이 줄을 서서 쇠사슬이던가 로프를 끌어당기어 무거운 돌을 옮기던 장면이었는데.... 그 줄이 이어진 끝 쪽, 바다 쪽을 살피니 그 줄은 작은 바지에 묶여 있고 그 바지 위에는 조각 난 철판들이 수북이 올려져 있다.
이들은 물 위에 떠있는 배(폐선)를 해체 조각내어, 크레인 같은 기구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서, 사람들의 힘만을 써서 육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세계의 폐선장이랄 수 있는 치타공 폐선장의 기본적인 파워는 이렇듯 믿을 수 없지만 인력이 주가 되는 모습이어서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하였다.
차에 오르기 전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다.
이미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인부들이 로프를 당기어 자신들에게 지워진 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두리도 바다 위 한 빈자리를 차지한 것에 만족이라도 한 듯 아직도 발라스트 해수를 뿜어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잘 가거라! 두리야.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아 얼른 창밖의 방글라데시의 풍경으로 깜박이는 눈길을 돌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