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 머물다

유령 표범이 사라져도

by 딴짓

아까 너 봤어. 그 막대기 들고 찻길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거.

다인실 숙소의 커플 중 젊은 남자가 턱짓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아, 이거. 얘 이름은 LOVE야.



러브. 나는 그녀를 이 마을의 초입에서 발견했다. 얼마 전까지 나뭇가지였을 그녀는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도로 한복판에서 위험천만하게 몸을 뉘이고 있었고, 나는 차마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닌데, 그녀를 쥔 순간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를 LOVE라고 불러도 될까.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의 주인공 월터는 상상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꿈꾼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부 끝 마을 세이디스피외르뒤르를 그리며 아이슬란드에 온다. 나 또한 이 여정의 최종 목적지로 이곳을 꿈꿨고, 지금 나는 영화가 촬영된 마을 초입의 93번 국도를 걷고 있다. 러브와 함께.



내가 찍은 Love와 나



5월의 햇살이 뜨겁다. 월터가 롱보드를 타고 전속력으로 내려왔던 명장면의 촬영지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가볍다. 서두를 게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와 버렸다. 서부에서 출발해 지금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버스를 타고 서부에서 북부의 제2 도시까지 7시간, 거기에서 더 북부로 이동했다가 동부로 다시 4시간, 마지막으로 이 마을까지의 히치하이킹. 총 12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사실 서쪽에서 동쪽까지 국내선으로 1시간이면 이동할 수도 있었다. 그 옵션을 두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버스와 불확실성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매 순간이 소중했다. 내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중년의 월터가 롱보드를 타고 굴곡진 도로를 전속력으로 하강하는 장면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지금처럼. 나와 러브는 한참 동안 그 도로를 바라보았다. 햇살 속에서도 일부 눈이 쌓여있는 한 치 앞 산의 절경도. 도로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찰칵찰칵 신나게 셀카도 찍었다. 이후 우리는 마을 끝에서 끝까지 오랫동안 걸었다. 호수에 멍하니 앉아 오랫동안 물과 산의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역시나 혼자 가기에는 왠지 조금 으스스했던 뒷산을 함께 오르며 우리는 돈독해졌다. 산등성이를 타고 해가 넘어가면서 골드와 복숭아 컬러를 섞어놓은 듯한 빛을 뿌리는 찰나의 시간에 우리는 얼마나 숨을 죽였던가.


뒷산에 올라


영화의 또 다른 장면. 영화는 월터가 분실된 한 장의 필름을 찾아 전설의 포토그래퍼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겨가며 마침내 히말라야 정상에서 만난 포토그래퍼(숀 펜)는 유령 표범이라 불리는 희귀 동물을 순간 포착하기 위해 극한 추위 속에서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유령 표범이 눈앞에 나타나지만 그는 사진을 찍는 대신 그저 그 존재를 바라본다. "때로는 정말 좋은 것을 보면 사진을 찍지 않아. 그냥 그 순간에 머물지. If I like the moment, I stay in it." 그리고 그것은 유령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토록 고대했던 그 마을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왜인지 다음 날부터 나는 마을 내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없었고, 많이 망설였지만 결국 단 하루만 머물기로 결정했다. 18일 간 숙박비로만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여행은 숙소면에서 가성비가 떨어진다. 그렇게 나는 그 순간에 머물고 있었다.




또 다른 영화 와일드(Wild). 여행을 떠나기 1주 전, 지인의 추천으로 그 영화를 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 영화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장장 4,286킬로미터의 극한 트레일을 석 달 동안 이루어낸 실화 바탕의 여성 영화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킬로미터라고 하니 그 거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삶에 대한 모든 의미를 놓아버린 채 마약중독자가 되어 버린 주인공은 마지막 희망을 찾아 홀로 극한 트레일을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와 한 걸음 한 걸음을 함께 하며 나는 얼마나 울었던가. 영화 속에서 그녀가 스스로에게 자주 되뇌었던 "I'm not afraid. 나는 두렵지 않아."를 나 또한 여행 중에 얼마나 많이 내뱉었던가. 오직 내 발자국 소리에 의지하며 얼마나 많이 걸었던가. 그리고 나의 씩씩한 발걸음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나 스스로를 담담하게 껴안고 가만히 기뻐했던 순간들. 내가 나로 존재했던 그 시간.






"네 샌드위치 엄청 맛있어 보인다!"

둘째 날 아침, 다음 목적지까지 히치하이킹할 걱정에 그곳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젊은('어린'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백인 여성이 말을 걸었다. 왠지 좀 익숙한 얼굴이다. 앞으로의 이동 경로와 다음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동시에 소리를 꽥 질렀다.


아직 갈 길이 먼데 30회가 정해진 최대 횟수라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네요^^;;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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