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사라졌다. 한번 사라지면 엄마와 형이 몇 시간을 찾아 헤매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가 다시 나타났을 뿐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만취한 아버지는 신발 한 짝만 남긴 채 실종된다. 주민 모두가 떠나버린 황폐한 마을, 어머니는 쓰러져 가는 문방구의 카운터에 앉아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녀는 사십 대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동영의 형 동석은 삶에 절망하며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뤘고, 이후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된다.
한강은 소설 <붉은 닻>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자신의 삶에 닻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닻이 되어 주는 사람들. 닻을 갈망하는 이들, 혹은 원하지 않는 이들.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다. 닻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게 해주는 무엇이라면,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동영이 부러웠다. 나는 그냥 훌쩍 떠날 수 있는 그의 방랑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음속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간 어둠에 대해서는 애써 알고 싶지 않았다. 동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몇 날며칠을, 성인이 된 후에는 오랫동안 사라졌다. 피 마른 어머니와 형이 그를 찾아 헤맸지만 그럼에도 그는 홀연히 떠났고,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동석은 바닷물에 몸이 잠긴 동생 동영을 발견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물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그제야 주저앉는다. 동영은 그렇게 또다시 회귀하였다. 어머니가 주저앉을 때 내 마음도 안도감으로 주저앉았지만 동시에 나는 가만히 소리 질렀다. '동영아! 가! 가버려! 돌아오지 마!'
엄마, 이거 어떡해?
엄마, 나 어떻게 해?
엄마, 나 깨워줘.
엄마, 나 뭐 입어?
엄마, 먹을 거.
엄마가 해줘.
엄마가 뭘 알아.
엄마, 듣고 있어?
엄마.
엄마?
엄마!!!!!
나는 내가 엄마라고 불리지 않는 곳을 갈망했다. 그런 곳이 있기만 하다면 지구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숨고 숨고 또 숨고 싶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두 개나 있는 게 싫었다. 고흐는 정신병과 이명으로 자신의 귀 한쪽을 잘라버린다. 귀를 잘라버렸기에 이명도 반으로 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 속 물리적 닻은 가족의 거주 공간이자 생계수단인 문방구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의 붙박이는 형제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오지 않는 손님을, 때로는 가족을 기다리며 문 앞에 서 있는다. 그런데 기다리는 이는 왜 항상 엄마여야 할까. 그것은 서글프지만 숭고한, 숙명과도 같은 걸까. 빌어먹을, 뭔 개소리야.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린 나 자신을 비난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냉골의 문방구 카운터 구석에서 귀신같이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숨이 막혔다. 동석이가 돌아오면 예전처럼 셋이 소풍을 가자고 동영에게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만!
꼭 닻을 내려야 할까? 정착해야 할까? 평생직장을 찾아야 할까? 결혼해야 할까? 내 씨를 뿌려야 할까? 정착하면 꼭 행복할까? 편안할까? 모든 것이 해결될까? 할 거 다 했다는 느낌이 들까? 언제나? 누구나? 인간의 정착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고, 정착이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없다. 그보다는 부유하는 인간이 좀 더 본능에 가깝지 않나?
대한민국에서는 성인이 되더라도 평생 법적으로 원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우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 이상 원가족은 병원에서, 은행에서, 그 외 모든 공적 상황에서 나의 유일한 보증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대변인이 되고 싶다. 성인이라면 그냥 각자가 각자의 대변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되어도 좋겠다. 다만 가족이 절대자는 아니길 바란다. 나도 내 자식이 내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지 않고, 나 또한 아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 명만 있어도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꼭 한 사람의 절대 사랑이어야 할까? 그게 가능할까? 절대 존재 한 명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준다면, 그렇게 그이의 마음에 상대방이 살고 있다면 그이에게는 행여 그것이 큰 부담이 되지는 않으려나? 간에 부담이 되지는 않으려나? 그 사랑이 조금 덜 빛나고 작더라도 여러 명이 십시일반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나눠 주면 안 되려나? 그렇게 유토피아적인 생각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지금 그렇게 받고 있으므로.
한강이 이 소설을 쓴 게 1994년이니 벌써 30년 전이다. 당시에는 유일한 닻이 가족일 지도 모르겠다. 닻으로써의 가족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나는 점조직 같은 닻을 꿈꾼다. 잠깐씩 닻을 내릴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을 꿈꾼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 지친 누군가가 가타부타 말없이 가만히 와서 웅크리고 있다가 또 말없이 가버릴 수도 있는 곳. 거대한 닻 하나가 끊어지면 가라앉거나 흘러 없어지는 배가 아니라 작은 닻들이 사방에서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배를 꿈꾼다. 그렇게 여차하면 뛰어들 수 있는 쉘터가 많은 것은 생각만 해도 안심이 된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남은 셋은 서로에게 회귀해야 할 이유이자 굴레가 되었다. 동영에게, 동석에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집 외에 숨 쉴 어딘가가, 가족 외에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고단한 몸을 잠시 뉘이고, 말없이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이가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사라지거나, 가라앉아버리진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삶이란 원래 고난의 연속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