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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Apr 05. 2024

[번외 편] '아름다운 가게'에서 3천만 원을 쓴 여자


이제는 한순간에 튕겨나가지는 않는다. 아들이 돌연 학교를 짼 날, 즉각 멘털이 나가버리며 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은 적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오늘 오나요?’라는 담임의 메시지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저도 모르죠’라는 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긴 하나 그러게 답할 수도 없고… ‘상황을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따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보냈다. 그거나 그거나.



작년, 아들의 지각과 결석이 본격화되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분노와 좌절로 어쩔 줄을 모르며 황급하게 에코백에 텀블러만 쑤셔 넣고 집을 나왔다. 아들과 함께 있는 집이라는 공간에 숨이 막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카페에 가고, 탄천을 걷고, 도서관에 들르고, 육교에 서서 울었다. 그 와중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길거리에서 먹으면서 다녔다. 어느 날 인적이 드문 버스정류장에 앉아 빵을 뜯고 있는데 픽, 웃음이, 연이어 울음이, 마치 한 세트처럼 터져 나왔다. 이건 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아줌마 버전도 아니고.






아이쇼핑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싫었다. 그렇게 집에서 걸어 5분 거리인 ‘아름다운 가게’라는 중고 옷 가게에서의 아이쇼핑이 시작되었다. 중고 옷 가게이지만 늘 정리가 정갈하고 센스 있게 상품이 진열된 곳. 나는 그곳을 휘휘 둘러보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한 두 개씩 사 오곤 했다. 2만 원 미만의 행복이었다. 갑작스레 집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 무거울 때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그저 나 자신을 집이라는 공간에서 꺼내 다른 공간에 방치해 버리고 싶을 때 발걸음을 향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치 꼭 사야 할 게 있는 것처럼, 일이 있어서 거기에 온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런 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어머, 너무 예쁘다! 나도 예전엔 작은 사이즈 다 입었는데!”

그날도 고른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모양새를 보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택이 달린 상의에 모자에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그곳에서만큼은 나란 존재조차 잊고 싶은 나였지만 계속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말을 걸어오는 통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한참을 서서 수다를 떨게 되었다. 그러다가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아름다운 가게에 와 있게 되었는지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같았다.



“딸내미가 고3인데 아주 내가 미쳐요. 몸무게가 45킬로야. 힘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 무슨 공부를 해? 맨날 자요. 학교에서도 맨날 잔대. 그래서 내가 맨날 여길 오는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주변 시선을 살피더니 내게 몸을 바싹 붙여 소곤거렸다.



“내가 여기 한의원에 다니는데 한의원 오면서 한번, 진료 끝나고 나오면서 한번, 그렇게 하루 두 번 여길 들러요. 그렇게 해서 산 걸로 매일 다르게 입는 거야.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내 만족이지. 그런데 산 물건이 너무 많아지네? 남편이 뭐라 할까 봐 봉지 봉지를 신발장에도 숨기고, 아파트 지하에 고양이 집 안에도 숨겼다가 나중에 쓱 가져오고 했다니까?”

“그런데 연말 정산할 때 남편한테 딱 걸렸잖아. 글쎄 1년에 여기서 쓴 돈이 3천만 원이더라고!” 



3천만 원. 티셔츠가 3천 원인 중고 옷가게에서 3천만 원의 소비.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하하!”

2초 후, 우리는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하던 매장에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의 고백으로 그렇게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옷 살 거유? 우리 딸내미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옷 나한테 넘기면 안 돼요?” 그 와중에 딸내미를 위해 옷을 달라는 여자.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급 어색해지며 서둘러 헤어졌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중고가게에서 3천만 원을  여자. 이상한 여자네, 쇼핑중독이야, 싶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녀를 험담하고 싶지는 않다.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던 그녀는 철부지지만 안쓰럽고 심지어 약간 귀여워 보였다. 최소한 같은 이유로 집을 나온 내 눈에는 그랬다. 엄마의 소소한 일탈. 문득 비슷한 상황의 다른 엄마들이 궁금해졌다. 다들 자신만의 소소하고 은밀한 일탈이 있으려나?



그렇게 한때 종종 들르던 아름다운 가게에 이제는 가지 않는다. 그 또한 시들해지기도 했고, 물건을 사서 쌓아놓는 게 내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택근무 중이라 늘상 츄리닝 바람이다. 아들이 그러덜 말덜 문을 박차고 성급하게 나가버리는 일이 줄기도 했다.



불현듯 그때 그 여자분이 생각난다. 그녀는 요즘도 아름다운 가게 OO점의 VIP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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