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딴짓 Jun 22. 2024

그때 뒤돌아 봤더라면

헤어진 남친은 거기 서 있었을까

오늘 저녁에 카페에서 그림 그리기 행사하잖아. 오늘의 주제가 너구리더라. 재미있지 않아? 이따 가보려고.”



그렇구나. 나는 의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럽에서도 물가 높기로 악명 높은 아이슬란드에서 여행자들이 다 인실 숙소에 머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40대 중반에 처음 경험해 보는 다 인종의 다인실에 나는 꽤 긴장했다. ‘처음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건가?’ ‘차도 얻어 타고 여행도 같이 다니고 그렇게 되려나?’ 싶은 기대감부터, ‘내 나이는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 ‘오히려 한국인을 만나면 좀 어색하겠다’ 등의 긴장감까지. 그러나 막상 각자의 일정으로 이동이 잦은 여행객들은 같은 방을 쓰더라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이슬란드에 온 지 3일 차,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나 또한 룸메이트들과 말을 터볼까, 싶은 생각보다는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다 오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오늘은 그녀와 말을 튼 것이다. 여성 전용 6인실에서 만난 활기찬 미국인.



내가 머무는 호스텔의 루프층에 있는  겸 펍은 소소한 행사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늘의 이벤트는 ‘Drink & Draw.’ 주어진 주제로 그림을 그려 데스크에 내면 맥주 한잔을 할인해 주는 행사였다.    




오후 내내 다운타운 외곽을 걷고 돌아온 나는 피곤함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잠이 깼다.



“안녕.”

“미안! 나 때문에 깼지?”



이제 막 도착했는지 그녀는 짐을 풀고 있었다. 한두 마디 주고받기 시작했을 뿐인데 파란 눈의 그녀가 뿜어 내는 젊은, 혹은 어린 에너지가 대단했다. 오늘 저녁에는 뭘 할 건지를 묻는 그녀의 말에 문득 빈 침대가 보였다. 벌써 갔나 보네. 나는 오늘 여기에 그림 그리기 행사가 있는데 미국 애는 벌써 갔나 보다고 말했다.



“진짜? 대박. 재미있겠는데? 가봐야겠다. 같이 갈래? 가자!”



그렇게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루마니아인이 저녁 행사를 위해 나섰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여러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어울리는 건 너무 어색한데. 한국인 특유의 소심함이 삐쭉 새어 나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제 겨우 통성명을 한 중국 아가씨는 나보다 더한 것 같았다.   






큰일 났군. 테이블을 가득 채운 백인들과 시끄러운 영어 대화 소리에 나는 벌써부터 기가 죽었다. 벽마다 전시된 이전 행사의 그림을 기웃거리다가 우리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먼저 나선 미국인까지 합류하여 여자 넷. 각자의 앞에 빈 종이와 펜 하나씩을 두고 어리둥절해하던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돌연 박장대소를 했다.



“아니 갑자기 라쿤(raccoon, 너구리)이라니 너무 생뚱맞은 거 아냐?”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려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와 난 도저히 못 하겠다. 검색해 볼래.”



아예 손을 못 대고 있는 우리 셋에 비해 루마니아인은 눈빛이 반짝였다.

 


“사실 나 타투이스트야.”

그녀는 자신의 SNS을 보여줬고, 그녀의 작품을 본 우리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타투 아티스트였다. 타투, 문신.


우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너구리가 더 흉측하다고 주장하며 킥킥거렸다. 영어가 유창한 미국인과 루마니아인, 그리고 그렇지 못한 아시아인 둘의 대화는 그림을 빌미 삼아 끊이듯 이어졌다. 아이슬란드에 왜 왔는지를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낯선 이에게 자신의 고민까지도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손 꼽히는 타투이스트들이 다 루마니아인인 거 알아? 루마니아에서는 타투가 엄청난 인기야. 나도 열다섯 살 때부터 몸에 타투를 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이걸 직업으로 하고부터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어. 늘 너무 많은 손님들로 숨 쉴 틈도 없어. 그런데 막상 루마니아에는 너무 훌륭한 타투이스트들이 넘쳐 나니까. 일은 많은데 내 존재감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 미국에 가서 일하면서 새롭게 도전해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어. 그래서 수년간 했던 일을 그만두고 아이슬란드로 훌쩍 넘어온 거야. 여기서 혼자 배낭여행을 하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려고.”



그저 철부지 노는 언니 같아 보였던 그녀는 다시 보니 영화 트와이라이트의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꼭 닮아 있었다. 미소년 같은 그녀의 눈빛이 깊게 빛났다.






후딱 그림을 그린 후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던 우리 셋과 달리 그녀는 꼬박 한 시간을 그림 그리기에 매달렸다. 다른 건 몰라도 드로잉이라면 그저 재미로라도 대강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할인받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으면 좋았으련만 우리 넷은 술도 할 줄 몰랐다.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세 시간 동안 왕 수다를 떨다 보니 이미 시간이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5월 중순은 백야로 해가 지지 않았다.



“나갈래?”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중국인은 먼저 숙소로 들어가고 우리 셋은 다운타운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이지만 그저 해 질 녘처럼 살짝 어두워진 거리를 여자 셋이 오랫동안 어슬렁거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아이슬란드가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정해진 샵 외에는 알코올이 들어간 술이라면 내국인에게도 팔지 않는 아이슬란드의 거리는 깨끗했다. 내가 아이슬란드에 왔구나. 그 여유로움이, 존칭이 빠져버린 언어의 자유로움이, 낯선 자들과의 동행이 마치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든 침대가 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잠들기 전 안녕을 고했다. 그들은 아이슬란드의 동쪽으로, 혹은 집으로, 또는 다른 나라로 각자 떠났다. 나도 곧 북쪽으로의 여행이 시작될 터였다.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잔잔하게 아쉬움이 몰려왔다.






다음 날, 잃어버린 세면도구 가방을 찾아 그 숙소에 다시 들렀다가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이번 주 우승자. 공짜 맥주 먹으러 오기 바람.

 

“헤이 산드라! 네가 우승했어!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

나는 그녀의 SNS에 우승자 공지 문구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고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즐거워했다. 그녀는 이미 국내선을 타고 동부로 날아간 뒤였다.



“맥주는 다음번에 얻어먹는 걸로! 계속 이 어드벤처를 즐겨 보자고!”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이 깃들길 기원했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이, 그러나 여기 어딘가에 수많은 그네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홀로 아이슬란드로 흘러 들어와 오늘도 뚜벅뚜벅 자신만의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는 자들.



웃자고 그린 후 깡그리 잊어버린 그림을 이곳 사람들은 정성스레 전시해 놓았다.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주는 자들. 그렇게 우리는 떠났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면 가방을 그곳에 두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곳을 다시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산드라의 우승 소식은 영원히 몰랐을 텐데.

그러면 산드라가 동부에서 본 엄청난 풍경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을 텐데.

이것은 우연일까 아닐까.



재미있네.

삶이 참 재미있어.



문득 앞만 보고 미친 듯 달려온 세월이 떠올랐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때 그 아이는 우리가 헤어진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을까?



그 순간 생뚱맞게도 20년도 더 된 기억이 소환되었다.

2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미세하게 아련해져 왔다.






인생의 어떤 길에 서있던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멈춰서서 뒤 돌아볼 수는, 가끔 그래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 숨도 고르고, 주저하기도 해 보고, 그리고 가만, 어쩌면 돌아갈 수도 있고?



씽끗, 그렇게 나는 혼자 웃었다.      


편의를 위해 영어 대화를 한국어로 표기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4화 8.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다(마무리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