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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n 24. 2024

우리의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어

버스 투어에서 만난 당신과 나 

Good morning everyone. Beautiful weather as you can see.

There are two seasons here, winter and disappointment. 

And now is the disappointment season, so you may endure…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뷰리플 한 날씨네요. 

아이슬란드에서는 두 계절이 있는데요, ‘겨울’과 ‘실망스러움’인데 

오늘은 ‘실망스러움’이네요. 그러니 좀 참아주실래요?



어두컴컴한 하늘과 굵은 빗방울이 심상치 않다. 아이슬란드에서 관광버스투어를 떠나는 아침,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 루카스의 익살맞음에 픽 웃음이 나왔다. 재미있는 아저씨네. 



아이슬란드에 닷새 째 머물면서 비 온 날은 이번이 이틀 째. 이곳 날씨가 워낙 변덕스럽고 비 오는 날도 많다고 들어서일까? 오늘 관광은 망했구나,라는 느낌은 없다. 어떻게 되겠지 뭐. 스산해서 더 아이슬란드 분위기 나겠네. 혼자 하는 편안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한없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이 관광상품은 이틀 전 부킹닷컴에서 예약했다. 어차피 배낭 여행으로만으로는 많은 곳을 가볼 수는 없으니 본격적인 여행 전 가볍게 버스 투어를 한번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골든서클(golden circle)은 아이슬란드에 오는 여행객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는 여행 코스를 말하는데, 화산으로 인한 거대 분화구(Kerið), 온천수(geysers of Haukadalur)가 뿜어져 나오는 광경 및 거대 폭포(waterfall Gullfoss)의 절경,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국립공원(Þingvellir National Park), 이렇게 네 곳을 하루에 도는 코스이다. 이곳의 물가를 생각했을 때 10만 원 내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서부의 주요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이다. 단, 가이드의 설명이 영어로만 제공되기 때문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덟 시 반까지 집합하라더니 수 십 명의 관광객을 일일이 호명해 탑승객을 확인하고, 대형 버스 몇 대에 쭉 태웠다가 다시 목적지에 따라 관광객들을 버스에 재배치하는 과정을 지나 최종 출발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나 인솔자도 관광객들도 표정이 편안하다. 유럽인들의 여유로움일까. 나도 그러려니 해 본다.



인솔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의 이름을 호명하는데 애를 먹는다. 내 이름이 언제 불려질까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인솔자의 주변에 겹겹이 둘러서서 귀를 쫑긋 하고 있던 우리는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보려고 몇 번이나 용을 쓰다가 결국 실패하자 까르르 단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니 왠지 조금, 아니 꽤 친해진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나라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왔구나 싶어 신기하고, 우리 모두 여기가 낯선 똑같은 여행객이구나 싶어 일종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참 좁게도 살았구나 싶어 조그맣게 한숨도 새어 나온다. 역시나 한국인은 나 혼자다. 



버스가 출발하고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아이슬란드에 대한 루카스의 설명이 이어진다. 아이슬란드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부터 지형, 화산, 날씨, 경제와 사람들까지 모든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반 정도 알아 들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열로 인한 재생에너지 사용으로 매달 전기세가 거의 무료에 가깝다. 새로운 산업을 시작할 때는 친환경 개발을 원칙으로 삼는다. 2030년부터는 전기 차만 생산 예정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루카스가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과 가진 커피 타임에 대해 얘기할 때 하마터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아이슬란드인 친구가 여기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길래 

대통령과도 만날 수 있다길래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전화번호부에 나온 연락처로 연락하면 되지, 하길래 

전화를 했고 

대통령 비서가 용무가 뭐냐고 묻길래 

대통령과 차 한잔하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기다려달라더니 일정을 잡아 주길래

대통령과 약속을 잡았는데

그날 아침, 뭐 입고 가지?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대통령 영부인인 엘리자 리드(Eliza Reid)의 광팬이다. 아이슬란드의 용감한 여성들에 대해 쓴 그녀의 책에 큰 감명을 받은 나는 실은 이 여행 중에 혹시 그녀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계시인가. 



루카스는 수도 레이캬비크의 전 시장을 만난 이야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번에는 전 시장한테 전화를 걸어봤는데
그는 대통령보다 좀 더 바쁜 사람였는지 

몇 주 후에 만날 수 있었고 

만남의 조건도 붙이더라고. 

맥주를 가져오래나.

참 유쾌한 시간을 가졌지.  

그 양반이 이번 6월 1일에 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잖아. 

내 표는 그 양반 거지 뭐. 





재미있는 이야기에 쏙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첫 목적지인 케리드 분화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40분간 자유롭게 주변을 돌러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녀와 나는 어느새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브라질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티안은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맘으로, 육아와 직장생활의 번아웃으로 부부 상담을 받던 중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며칠 간의 나 홀로 여행을 왔다. 조용하며 깊은 눈매를 가진 그녀와 나는 금세 편안해졌다. 우리는 잔비가 쏟아지는 분화구를 말없이 응시했다.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숨죽여 관찰하고,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 폭포 앞에서는 엄마는 강하다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버스가 어느 휴게소에 들렀을 때였다. 휴게소 내의 기프트샵에 전시된 올드카를 본 그녀가 돌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실은 저 차 번호가 아기였을 때 하늘나라로 간 큰 아이와 관련이 있어요. 

그냥… 그 아이와 관련된 것을 보면 무조건 사진을 찍어요. 



나는 어느 날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아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나의 뱃속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도 태어났었으면 큰 아이였다.   



늘 같이 있어요. 지금 여기도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같은 아픔에 두 아들 맘이라는 점까지 닮은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가까워졌다. 






마지막 코스인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였다. 우리는 역시나 꼭 붙어서 그러나 그저 말없이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인 듯 혼자가 아닌 그 시간이, 그 동행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딱 한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제야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을 깨달았다. 허겁지겁 되돌아 뛰기 시작했지만 갈 길이 까마득했다. 


집합 시간 10분이 지난 시간, 버스 기사가 뛰어오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일부러 차에 시동을 걸고 실금실금 운전을 하고 있었다. 
“Stop! Stop~~~!”

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유난을 떨었다. 



두 좌석 빼고 만차인 버스에 올라타자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Sorry, everyone! Maybe I wanted to disappear!”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나 봐요! 



불쑥 나온 그 말은 무의식 중의 진심이었으려나?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본 운전기사 분은 소주를 사내라고 농을 걸었다. 아이슬란드 펍에서 파는 소주는 한 병에 4만 원 꼴이다. 




하루 종일 꼭 붙어 다닌 우리는 헤어질 때 깊은 포옹을 하며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그녀는 더블린에 오면 반드시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슬란드 아래에 있는 아일랜드에 친구가 생겼다.  




하루 종일 아이슬란드의 최고 관광 명소를 눈에 담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었다. 가이드 루카스의 말, 크리스티안, 그리고 여행지를 바라보던 나 자신의 시선과 생각.  


“This is meant to be.”

우리의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어. 

이것은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어. 

이것은 운명이야. 



헤어지기 전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따듯했다. 나는 그 말을 여행 내내 자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 두 아들의 엄마, 직장여성, 여자, 그리고 그냥 인간 크리스티안의 행복과 평안을 가만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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