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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n 19. 2024

8.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다(마무리 이야기)

해 버렸어

(전 편에 이어집니다)


“Hello, everyone. Thank you for joining us. My name is ……”



나는 내가 어쩌다가 아이슬란드에 오게 되었고, 어떻게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언급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집에서도 여러 번 연습한 내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수차례 들었다. 나는 아들로부터 도망쳐 왔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가고 싶었어.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아이슬란드에 숨어들고 싶었어. 여기에서는 ‘엄마로서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해줄 것 같았어. 나는 그냥 나로 존재하고 싶었어. 그저 나로 빛나고 싶었어. 숨 쉬고 싶었어. 나를 안아줘서 고마워, 아이슬란드. 이제 나도 한국의 고운 책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들어 볼래? 



그들에게 일일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아이슬란드에게 말하고 있었다.  




넓고 네모난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6, 7명. 자유롭게 서서 듣는 사람들까지 약 15인 앞에서 나는 먼저 그림책 모임에서 함께 선정한 25여 권의 책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그리고 그중 두 권을 한국어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한국인들의 표정과 현지인들의 표정이 확연히 달랐다. 한국인들은 이야기에 집중하며 웃고 있었고, 한국어를 모르는 현지인들의 얼굴에는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든 중국어로 말하든 아랍어로 말하든 그들에게는 매한가지일터였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각본에는 없었지만 군데군데 영어로 설명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어설펐다. 많이 어설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태도와 영어말하기가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사이 발표 시간은 후딱 끝나 버렸다. 이후 시간에 아이들은 핸드아웃으로 나눠준 그림책의 캐릭터를 색칠하고, 한글 자모임 스탬프를 찍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특히 어른 아이 할거 없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출력해 주는 활동을 좋아했다. 권유하지도 않았는데 청소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끝까지 호랑이를 색칠하던 십 대 아이 둘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수많은 준비과정과 용품들.

그에 비해 많이 아쉬웠던 전시 상태와 나의 발표.



릴랴가 아이슬란드어로 책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는 시간 전체가 통으로 빠졌기에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그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했어야 했다. 기증될 총 스물다섯 권의 책을 한 권 한 권 들여다보며 설명을 덧붙여야 했는데.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운데 탁자로 모여 책을 한 권씩 들여다보는 단계를 진행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발표 시간이 훨씬 풍요로워졌을 텐데. 그런데 나는 허둥지둥 원래의 계획대로 대략 책을 훑고 말았다. 전시되어 있는 책을 각자 살펴보시라고 말로만 하고 말았다.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어.

그래야 했어.

혼자만 말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질문도 주고받을 걸.

누구 혼자서 끌고 가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유연하질 못해. 나이는 뭐로 먹은 거야……

바보.

바보!!!!!!!!!!!!!!!!!!!!!!!!!!!!!!!!



발표가 끝나고 참여자들이 떠난 공간을 정리하면서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쉽다.

아쉽고,

아쉽다.



문득, 지금 이 시간 아이슬란드에서 잘하고 있으려나 궁금해하고 있을 한국의 많은 여인네들이 생각났다. 책을 지원해 준 출판사들도 떠올랐다. 아… 여러분 끝났습니다… 으흐흑…



“아이슬란드에서 한국 행사에 참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대단하세요. 또 오시나요?”   

아이슬란드 회사에서 근무하게 된 아빠를 따라 몇 년째 아이슬란드에서 체류 중인 4인 가족.


"오늘 이벤트, 너무 소중하고 귀했어요. 한국 이름 정말 고마워요!"

십 대 아들이 가보자고 해서 참여했다는 여성.


“제 엄마가 한국 분이세요. 저는 한국말을 잘할 줄 모르지만 한국 거라면 항상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요. 고맙습니다.”

서툰 한국어로 말하던 한국계 하와이 여성.



“Perfect and wonderful setting.”

(영화 리뷰 아님)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를 걸어오는 파란 눈의 예쁜 아가씨. 그녀는 수줍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무려 한국과 일본의 설화에 대해 아이슬란드어로 책을 낸 저자였다.   






My wife is from Albania and we go there frequently. There is a couple there that are good friends of ours and they started watching KDrama. I am taking some of the things you gave at the Gerduberg event to Albania and will tell them the story. I enjoyed the day very much.

I hope you have a wonderful trip.

아내가 알바니아인이라 알바니아에 종종 가요. 거기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어요. 행사 때 나누어 주신 엽서 등을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말해 줄 거예요. 행사 정말 재밌었어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무뚝뚝해 보였던 아이슬란드 아저씨가 이 메일로 보내온 내용.





부족했는데, 너무나도 부족했는데.



다시 생각해 본다.



떨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20년 전, 학원 가맹 원장들의 미팅에서 저 말 못 하는 젊은 여자를 끌어내라고 삿대질을 받고 머리가 하얘졌던, 10년 전 중국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세미나를 완전 망쳐버려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4년 전 온라인으로 하는 회의에서도 땀으로 등이 다 젖고 손이 바들바들 떨려 화면 밖으로 손을 숨겨야 했던, 그렇게 5인 이상 앞에 서면 숨이 막히고 손이 떨려 살아있는 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죽도록 다짐했던 나는, 역시 이번에도 많이 부족했지만, 떨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잘할 수 있겠다. 다음엔...?



휴우.





그제야 눈을 들어 도서관을 살펴봤다. 찬찬히 걸어보았다. 손때가 많이 탄 도서관은 오랫동안 잘 가꾸어진 서재 같고 거실 같은 구조가 여럿이었다. 굉장히 넓으면서도 섹션 구분이 잘 되어 있고 아늑해서 어디에 앉아서 책을 읽어도 집중이 잘 될 것 같은 곳. 통문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카우치 소파에 나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Hey, LIlja, without you, I couldn’t make it.”

“I’m happy for you! You’re so great today! And thank you for the great experience you shared me.”

릴랴,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해내지 못했을 거야.

오늘 너 정말 멋졌어. 나도 기뻐! 이렇게 멋진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BTS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자축했다.




“So, are you ready for the trip now?”

“Absolutely!”

그래서 이제 여행할 준비 됐어?

물론이지!



입가에 강렬한 미소가 차 올랐다.

그렇게 내 인생 최초의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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