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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l 18. 2018

37. 상실을 넘어 망각의 시대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일요일, 꽤나 중요한 시험을 치렀다. 무더위와, 잘 보지도 못 보지도 않은 애매한 시험 결과의 여파도 여지껏 기승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그전부터 망치진 않겠지만 기대보다 안 나오리란 걸 어렴풋이 직감했다. 여지껏 살면서 쌓아온 성취의 궤도를 추적하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측 가능하다.


난 결국 원하는 걸 이루긴 한다. 가는 길이 조금 험난할 뿐. 험난함의 원인이 남들보다 불리한 외적 요인(가정환경, 경제력 등)이 아니라 투입(input) 대비 산출(output)이 뒤떨어지는 나 자신이라 이미 위대함과 거리가 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쉽지만. 그저 남들보다 더 많이 투입하고, 뒤떨어지는 output에 덤덤해지면 그뿐이다. 다행히 그 정도 견딜 의지만 잃지 않으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에는, 언젠가는.


시험 삼 주일 전, 전 남자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예쁘고 멋진 김비서와 부회장이 꽁냥 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 척하며 박서준에게 집중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다. 이 사람으로부터 연애 중에는 한 번도 이 정도 장문의 글을 받은 적 없었다. 무려 전체보기로 넘어가는 장문을 쓰느라 고생했겠다. 그가 작성한 메시지의 요지는 굉장히 명확했고, 내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일까 노심초사하는 기색 또한 글 전반에 역력했다. 하지만 그가 왜, 어떤 심정으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글을 보냈는지 역시 너무나 잘 알겠어서 별다른 동요는 일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에 대한 답장으로 난 그저 해주고 싶은 말을 건넸다. 그 사람이 행복 해지기 위해 필요할 거라 생각되는 말을. 엄청난 인내심으로 보낸 선의의 메시지를 냠냠 씹어 먹는 그가 끝까지 이기적이라 느꼈지만 연애 중에도 나의 말이 그의 귀에 닿지 못한 지가 언젠데. 완벽한 타인이 된 이 상황에서 나의 말이 그의 행복에 기여하리라 여긴 내가 멍청이다.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던 이유는 그를 위해서라기 보단, 그가 내 과거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따위 위선은 이제 그만두고, 그 사람이 행복하길 빌기 까진 않으련다. 행복해지던가 말던가. 잘 살겠지.


시험 이주일 전, 첫사랑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모인 동기 언니들과의 모임에서. 그날 저녁 모임의 기억이 희미하다. 꽤나 충격을 받았지 싶다.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도 그 사람만은 특별하다고 믿어왔는데. 그 사람과의 추억에 혹여 먼지가 쌓일까 잊힐만하면 끄집어내 때 빼고 광내며 고이고이 지켜왔는데. 그의 결혼에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니다. (헤어진 지 5년이 넘은 과거의 망령에게 배신감이란 단어는 적절치 않은데 이보다 와 닿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미 진작에 했어야 하는 나이를 한참이나 넘어선 사람이니까.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 연락 한통 온 것뿐인데, 그 사람에게도 나는 특별했던가 보다고 나 좋을 대로 착각했다. 나도 그 사람에게 연락하고 싶을 때가 참 많았다. 언제라도 연락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없는 현실이 이미 너무 견고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절대 현재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그 사람을 현재에 쉬이 들이지 못하는 나를 통해 배웠다. 아무리 찬란했던 과거라도, 너무 많이 그립더라도 현재보다 소중하진 않아서 통화 버튼을 단 한 번도 누르지 못했다. 술에 너무 취해 충동성을 억누르지 못할 것만 같을 때에도 몇 년이나 연락 안 한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전화해 그 대신 그들의 잠을 깨웠다. 그에게 내가 특별할 게 없어서 가볍게 연락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아직도 난 내가 '누군가에겐' 특별할 거란 오만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완벽한 타인을 만나서 알아가고, 서로의 가족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준비하고, 결혼을 치르고, 기혼의 선을 넘는 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어느 누가 그러지 않겠냐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와 그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꽤나 신중한 편이었다.


이로서, 명백하다. 그는 아마 연애와 연애 사이 생긴 잠깐의 공백에서 외로웠을뿐. 아름다웠던 과거라던가 현재의 무게 따위를 딛고 나를 현재에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어렵게 먹은 결과가 연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소중히 지켜온 누군가에게 나는 단지 이 정도의 가벼움으로 남아있었다니. 먹먹하다. 과거는 현재보다 나약하다.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닌 듯싶다. 그저 완벽히 소멸시켜야는 지도 모르겠다.


시험 일주일 전, 전전 아니 이제는 전전전 남자 친구가 된 사람과 조우했다. 토요일 새벽 6시. 우리 집 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침대에 편안히 널브러져 있던 나는 망설이다 '그래 이걸로 끝을 내자'는 생각으로 세수만 한채 내려갔다. 피부 정리라도 할까 망설였지만, 굳이 화장품 낭비할 필요 없지.  그는 이전에도 헤어지자는 말을 뱉은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 집 앞에 찾아온 적 있었다. 그땐 나를 잡기 위해 온 것이었고, 이번엔 도대체 왜 온 건지 잘 모르겠다는 차이가 있지만.


같이 두 시간을 걸었다. 헤어진 이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최근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과 생각으로 과거를 소중히 여겨온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던 만큼 그에게 따져 물었다. 도대체 술 취할 때마다 전화하는 이유가 뭐냐고. 왜 나한테 전화하는 게 오빠의 주사가 되어버린 거냐고. 내가 만만하냐고.

"너는 내 청춘이야." 라는 그 답지 않게 낭만적인 답이 돌아왔다.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라 기습에도 척척 잘도 정답을 제시한다. 솔직히 즐거웠다. 나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나를 떠나보낸 과거의 선택을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헤어지고 꽤나 방황한 듯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이 시기적으로 이별 후에 생긴 것뿐이지만. 그는 그동안 열심히 살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난 열심히 살았어."라는 나의 말에 "역시, 자부심."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응.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 하나는 챙겼어."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 여자였음 좋았을 텐데 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을까. 그는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돌리고 싶을 뿐이지, 현재의 나와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그에게서 나를 봤다. 물론, 나는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 자신에게 할 말을, 그에게 전했다. "사귈 때는 몰랐는데, 오빤 참 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 헤어지고 나서야 그걸 알겠어. 그래도 역시, 과거는 현재를 이기지 못해."


과거의 사랑은 이쁘게 포장해두는 게 아니라 그저 불태워버리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온 마음과 시간을 쏟은 지난 관계들은 허무하기 그지없고 힘도 없다. 조금은 힘을 빼고, 가볍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저 이쁘기만 한. 그저 즐겁기만 한.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관계를. 현재일 때에도 아무런 힘이 없고, 과거로 남을 일은 더더욱 없는. 그저 솜사탕처럼 달콤함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그런 관계.

'시간이 지배하는 역사의 왕국에서 모든 사건은 일어난 그 순간 곧바로 상실과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맞는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p137

이미 상실의 아픔은 무뎌진 지 오래. 시련은 운명을 거스를 때야 온다니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자. 나의 과거도 그들의 과거처럼 망각과 소멸이 어서어서 잠식하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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