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무언가를 해내면 뿌듯함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태어나서 걷고 뛰고 말하면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아이처럼, 자기 주도성을 가지게 된 아이처럼 “내가 할 거야, 내가 할 거야!”를 외치며 내가 해낸 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다. 무얼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들으면 모두 당황스러울 것이다. 바로 여름맞이 에어컨 청소이다. 예전에는 이런 귀찮은 일들은 남편을 시키거나(비록 같은 말을 한 20번쯤 해야 했지만) 업체를 불러 해결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일을 처리할 남편도 없고 돈도 없다. 이혼을 하게 되어 예전에는 10만 원에 내 시간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면 지금은 10만 원 아끼고 내 노동력을 사용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를 찾아 참고할 만한 창을 켜놓고 드라이버, 물티슈, 소독액을 준비했다. 망가지면 어쩌나라는 걱정보다 지금 당장 저 곰팡이가 가득한 에어컨을 빨리 돈들이지 않고 청소하고 싶었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푸르고 선을 뽑기를 반복했다. 왜 이게 안 빠질까 더운 날씨에 화가 치밀 때도 있었지만 에어컨 날개와 안쪽을 닦아 깨끗해진 모습을 보면 역시 청소에는 그래도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 빼고 푸르고 돌리고를 반복하여 에어컨을 여러 개의 조각으로 분해한 다음 솔로 박박 문질러 사이사이에 낀 곰팡이를 지웠다. 검은깨처럼 곰팡이가 박혀있던 표면이 반들반들하니 말끔해졌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선풍기 바람으로 바짝 말린 에어컨을 다시 조립했다. 중간에 선을 잘못 끼워 다시 뺴기도하고 이음새가 딱 맞지 않아 원인을 찾느라 한참을 낑낑거렸지만 하고 나니 내년에도 혼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을 닦는 기술까지 얻게 되다니 진짜 어른이 되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분명 난 어른이었지만 삶에서 무언가 하나씩 이렇게 고장 날 때마다, 귀찮은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해결 방법을 찾고 실행하고 완성해나가며 어제보다 더 큰 어른이 되어간다.
지난 모든 고비가 그랬다. 육아휴직 후 복직하며 원하지 않는 곳으로 발령을 받아 왕복 3시간 거리를 출퇴근하고 논문을 쓰고, 어린아이를 키우던 때가 있었다. 이보다 더한 시련이 또 있을까 싶었고 이 상황만 잘 버티면 어떤 고난이 와도 다 이겨낼 것 같았다. 결국 아이는 컸고 다시 발령이 났고 졸업도 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 몰려와 마음이 삐그덕거릴 때가 있다. 그 마음을 이리저리 다시 조립하다 보면 이 길을 지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고 다음 역경을 이겨내고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
셀프 에어컨 청소가 남긴 건 시원하고 상쾌한 에어컨 바람만 있는 게 아니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환경, 그 환경 속에서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쉬고 있는 나를 남겼다. 올여름 시작부터 기분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