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회사원
인턴십도 아닌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였기에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에 방문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형식적인 면접 자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개념이 없다 느껴질 만큼 엉망인 복장으로,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회사에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00 소개로 아르바이트하게 된 00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당시 나의 상사가 나를 곱게 봤을 리가 없다. 복장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니 첫인상은 아마도 최악 중의 최악이었을 것이다. 책임감도, 예의도 없는 20대 철없는 대학생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장 급하게 필요한 3개월짜리 아르바이트였기에 어쩔 수 없이 단기 채용에 동의했으리라 짐작한다. 다행히 3개월 아르바이트 과정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들이 가졌던 나의 첫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3개월 근무 기간 중 회사는 사무실을 이전했다. 같은 건물 내에서의 이동이 아닌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이사를 하는 당일은 주말이었고, 나는 출근을 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주말에 일을 한다고 추가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내가 계약직이라는 위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마치 회사의 정규직 직원처럼, 모든 주어진 업무를 내 일이라 생각하며 일했다. 당연히 나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해서 사무실이 이사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다음 날인 월요일에도 어수선한 사무실 정리를 도맡아 했다. 이삿짐 정리에 몸살이 났는지 몸에서는 식은땀이 났고 얼굴은 창백하게 표정을 잃어갔다. 그런 나를 보신 과장님이 얼른 집에 가서 쉬라고 배려를 해주셨다.
후에 들었지만 과장님은 이사할 당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해서 일손을 거들어준 모습이 많이 인상 깊었다는 얘기를 하셨다. 모자를 눌러쓰고 온 첫인상으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어떤 일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에서 책임감 있는 녀석이구나 싶었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하지만 계약된 3개월이 끝나고 나는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만을 고집하진 않았던지라 취직은 어렵지 않았다. 중소기업, 외국계 기업 등 여러 곳에 면접을 보았고 실제로 합격해서 한 달가량 근무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회사를 1개월 이상 다니기가 힘들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는 3개월을 무리 없이 업무가 가능했는데, 정식으로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워 실패하고 다시 취준생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전 3개월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에서 나를 좋게 보았던 과장님이 다시 일해볼 생각이 없겠냐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3개월 정도 되는 일자리였다. 다른 회사를 전전하며 적응에 실패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단기 업무를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전과 똑같이 성실하게 일했다.
두 달여가 지나갈 무렵, 회사 내 다름 팀에서 임시 업무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다. 경력직으로 채용된 직원이 약 3개월 후에 입사가 가능하기에 해당 기간 동안만 대신 업무를 봐달라는 요청이었다.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정식 입사한 회사에서 적응을 실패하고 1개월 만에 그만둔 내가 이 회사에서는 적응이 어렵지 않았으니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오케이였다.
그렇게 새로운 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격적으로 그리고 업무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과장님 밑에서 업무를 배우며 도와드리길 2달 반이 지났다. 이제 2주 남짓 나의 업무 기간이 남았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경력직으로 입사하기로 했던 사람이 입사를 취소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 과장님은 큰 결단을 내리셨다. 또다시 경력직 채용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나를 정식 채용해서 같이 일을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팀에 보조 역할을 할 자리는 오직 한자리 뿐이었고, 그 자리는 당연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채워졌어야 했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칠게 너무나도 많은 나와 같이 일을 하겠다고 결정을 하셨다. 그 당시 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정규직 입사 제안을 받고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감사하는 마음과 걱정되는 마음이 함께 소용돌이쳤다. 과장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셨다 하더라고 대기업 입사를 위한 인적성검사와 임원 면접을 프리 패스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나에게 팀 사람들은 꼭 잘 볼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응원을 해주셨다. 인적성검사를 본 날을 매우 건조하게 바람이 많이 불고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온 그 시간 건조한 바람이 일으킨 모레가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던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날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인적성 검사 점수는 그룹 커트라인을 훌쩍 넘어섰고, 임원 면접도 무리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너무 성실하게 일해줬는데도 아르바이트 월급밖에 줄 수 없어서 미안했는데, 입사 축하해!"
모자를 푹 눌러쓴 나를 면접 보았던 과장님께서 축하해 주시며 합격 소식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나는 대기업 회사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