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라는 강력한 동기
남의 집 살이는 정말 녹녹치 않은 거였구나, 2년마다 이런 진통을 겪어야 하는 남의 집 살이를 오랜 시간 어떻게 하는 걸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매일 표류하는 느낌인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 전셋집을 구해서 살아본 건 처음이었지만 전세 만기 스트레스를 한번 겪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 집 마련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때 당시 거주했던 낡은 아파트 단지 가격이 지금의 1/6 수준이었다. 아빠는 매일같이 입만 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 되는 거니까 국물도 없다."
"아빠, 그럼 나 시집 안 갈 거니까 집 사게 결혼자금 지금 주면 안 돼?"
당당히 얘기하고 대차게 까였다. 주택 담보대출을 받아서 샀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몇 억대 대출은 인생이 망한 사람들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기에 아빠에게 거절당하고 바로 포기를 해버렸다. 전세자금 2천만 원도 힘들게 갚았다. 그렇게 내 집 마련의 첫 번째 기회를 흘려보냈다.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지만 거주하던 동네를 떠나고 싶진 않았다. 낡은 아파트에도 적응했고, 주변 편의 시설과 교통, 입지가 생활하기 편했기에 같은 동네 작은 평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옆 단지 작은 평수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신혼부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된 집이었다. 이번 집은 샷시도 2중으로 되어 있었다. 좋았어! 2중 샷시 확인 완료!!
따뜻한 봄에 이사를 하고 여름이 다가오자 이 집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두 번째 전셋집은 구축 아파트 제일 꼭대기 층 1호 라인이었다. 외벽에 바로 맞닿은 30년 넘은 낡은 아파트에 살아봤는가? 여름이면 외부 열기를 사방으로 받아서 집 안이 온실처럼 푹푹 찌고 겨울이면 외부 냉기가 온 집안을 돌면서 내외부 온도차로 외벽 쪽에 곰팡이가 생겼다.
덥고 추운 건 선풍기, 에어컨, 그리고 보조 난방 기구로 해결이 가능했다. 녹물도 필터를 끼면 해결된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건 곰팡이였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풍기는 그 퀴퀴하고 습한 냄새.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없던 피부병이 생겨서 낫지 않고, 나는 비염이 심해졌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전셋집도 대실패한 선택이었다. 오래된 아파트 그 차제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무지가 문제였다. 첫 전셋집의 이중샷시의 중요성에 이어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면 되도록 꼭대기 층, 끝 라인엔 살지 말자 뼈아픈 교훈을 또 얻었다.
그렇게 1년을 힘들게 버텨내고 이듬해 봄이 찾아왔을 때 더 이상 이렇게 남의 집에 살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2년마다 가슴 졸이며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전셋집이 내 집이 없는 결핍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렇겐 못 살겠다!! 나 무조건 집 살 거야!! 아빠가 그때 나 지원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지금 여기 2억이나 올랐어!!"
이번엔 성공했다. 1년 사이 2억이나 올랐다는 말에 아빠는 왜 그때 아빠한테 한 번 더 조르지 않았냐며 오히려 아쉬워하셨다. 성인이 된 후로 아빠의 지원을 처음 받았다. 어린 시절 무책임하게 우리를 서울에 두고 귀향한 아빠는 혼자서 외롭게 생활하시며 성실하게 사업을 하셨고, 엄청나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 결혼식 비용 수준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단비 같은 도움을 주셨다.
같은 단지의 소형 평수 아파트를 살기에 난 정말 너무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동네니까, 같은 단지에서 물건을 찾아 돌아다녔다. 1년 사이 2억이나 오를 만큼 바닥에서 치고 올라가던 시기여서 그런가 매물이 별로 없었다. 겨우 하나 나온 물건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님의 집이었는데 본인이 매도를 한 이후 전세로 쭉 살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실 거주를 해야 했기에 조건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려 강 건너 동네로 갔다. 아파트 연식이 10년 이상은 더 젊어서 상태도 좋았고 같은 가격에 더 큰 평수를 매수할 수 있었다. 그때는 부동산 입지 차이나 시세 흐름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였다. 평지에 한강변, 서울 중심부면 그저 좋았다.
'여기선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주변에 어떤 편의 시설이 있는지도 알아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정작 매수할 집은 실제로 임장을 하지도 못했고, 같은 동 비슷한 층 물건을 보고 나의 첫 집을 그렇게 덜컥 계약하고 매수했다. 처음 방문한 동네였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고 마음이 편했고, 크게 걸리는 부분도 없었다. 운명처럼 집도 인연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나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처음은 대기업을 입사한 때, 두 번째는 내 집을 마련한 때. 그 무렵 회사에서도 완전히 자리를 잡아 조직의 장이 되었으니 추운 겨울 눈물 젖은 붕어빵을 먹던 어린 대학생이 10년 사이 훌쩍 성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