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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될 도전

마지막 회사

by 직진언니



드디어 이사한 우리 집은 햇살이 가득하고 서울에서는 흔치 않게 앞이 뻥 뚫린 시야를 선사했다. 날이 좋은 날이면 저 멀리 강 건너 빌딩들과 더 멀리에 있는 산까지 도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는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터가 좋았던 것일까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회사 내에서 한 조직의 장으로 직책이 주어졌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얼떨떨하기도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하자는 생각 외에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부서장이라는 직책은 내가 스스로 혼자 일했던 부서원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의 업무 역량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했던 일을 이제는 부서원의 손을 통해 이루어내야 했다는 것이 가장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하면 1시간이면 끝날 일 일지라도 부서원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1시간 이상을 기다려주고 기회를 줘야 했다. 그리고 결과물이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나의 지시에 어떤 부족함이 있었는지를 되짚어 생각해 봐야 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이해심이구나를 약 반년 만에 깨닫게 되었다.






부서원으로 있을 때에는 미처 몰랐는 부서장의 역할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아갈 무렵, 회사에서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선배들의 이직 소식이 들려왔고 '그렇다면 나도?', '다른 회사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두 번째 회사를 이직할 때에는 헤드헌터의 이메일이 트리거였다면 이번엔 동료들의 이직 소식이 트리거 역할을 하였다.


호기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지인을 통해 새로운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1차 실무 부서장 면접과 2차 임원면접을 무난히 통과했다.


이미 두 번째 회사에서 신임을 얻어 부서장이 되었던 상황에 직책을 내려두고 부서원으로 이직을 하는 데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직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서장이 된 나에게 그 자리는 오히려 맞지 않는 옷이었다.


첫 번째 이직은 찬성을 했던 아빠도, 이제는 연차가 찼으니 이직을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말씀을 하셨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 당시엔 아빠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겁없이 두번째 이직을 하게 되었다. 한 두달 사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식하게 용감했던 탓에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두 번째 회사를 이직할 당시 나는 사회 초년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초년 차 회사원이었고, 두 번째 회사에서 동료들은 내가 공채 입사자인 줄 착각할 만큼 경력 입사자로서의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고연차 회사원으로 새로운 회사에 적응을 하려고 보니, 그곳에서 나는 그저 경력직 아무개였다. 이 전 회사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직원이었지만 이직한 회사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유관부서와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동안 겪어 보지 못했던 텃세를 겪기도 했다. 이 부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뿔싸, 어쩌면 내 선택은 되돌리기엔 너무나도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후회의 시간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랬듯 역시나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마지막 회사라고 생각하고 이직을 했기에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만두고 싶어도 나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을 은행과 함께 공동구매를 했기에 매달 지급되어야 하는 이자가 버팀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6개월, 1년, 그 이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회사에 적응했고 내 몫의 역할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채 5년이 되지 않아 나는 세 번째 회사에서 또다시 부서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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