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고마워요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저녁 무렵이면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동네에 퍼졌다.
"어서 들어와서 저녁 먹어~~!"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한 가족이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우리는 아빠의 직장 발령으로 인해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서울 변두리 지역의 빌라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때엔 방과 후 동네 친구들과 모여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평범한 일상이었다. 같은 빌라에 사는 언니, 오빠,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들과 마당에 모여 놀다가 밥때가 되면 엄마의 호출을 받고 모두들 우르르 저녁을 먹으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외출을 하신 날에는 아랫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갓 지어 따뜻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 버터와 간장을 비벼 한 숟갈 듬뿍 떠서 부추김치를 얹어 먹으면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어린 나의 입맛엔 일품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 주겠다며 문방구에서 파는 폭죽을 맨손으로 들고 불꽃놀이를 하다가 손에 화상을 입었던 6학년 오빠, 친구들과 빌라 마당 화단에 쓰러져 있는 참새를 발견하고는 참새를 두루마리 휴지에 둘둘 말아 작은 고사리손으로 받쳐 들고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던 순간. 모든 기억이 생생하다.
매일같이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미술학원에서 그림도 배우고 서예학원에서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글씨도 써 내려갔다. 피아노 선생님이 집에 오시면 피아노 건반을 열심히 두드렸다. 부모님께서 고루 경험할 수 있게 지원을 참 열심히도 해주셨다.
그런 부모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는 것 외엔 금세 싫증을 느꼈다. 그림 실력이 꽤 있었는지 전국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경필 대회에서 국회의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 집엔 국회의원이 상으로 준 컵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엄마가 어느 초등학교 안에서 종이를 한 장을 들고 환한 미소를 띠며 교문 쪽으로 걸어오셨다. 오빠와 나는 교문 밖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서울에 아파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근무했던 직장에서 건설한 아파트였다. 어떻게 우리 가족에게 이런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는지 어렸을 때라 잘 모르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서울에서 두 번째 동네로 이사를 갔다. 처음 살았던 곳보다는 조금 서울의 중심에 다가선 동네였다. 정들었던 동네를 떠나 친구들과 이별하고 학교도 전학을 했다. 이별의 슬픔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슬픔도 잊을 만큼 새 아파트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꾸며주신 내방은 동심의 눈으로 보았을 때 동화 속 공주님 방 같았다. 핑크색 책상과 옷장, 그리고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연한 연둣빛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바스락거리는 얇은 커튼을 뚫고 햇살이 따뜻하게 방을 비췄다. 창밖을 보면 뒷산의 초록이 액자처럼 걸려 있었고 방 한편엔 피아노도 존재감을 뽐내며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 이렇게 제 방을 예쁘게 꾸며주셔서 고마워요."
그 방을 준비하는 내내 엄마는 얼마나 고민하셨을까. 내가 좋아할지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동화 속 공주님 방이었다. 아직도 마음속엔 내 방의 따스한 풍경이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