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디자이너의 마음들]
이번 프로젝트는 특별히 인테리어 도안을 발표할 때 직접 가서 사이트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날 예정이었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모형 건축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저녁을 산다는 말로 팀원들을 격려하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펜션 브랜드 북을 마저 편집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동쪽에 새로 오픈하는 단독 스테이 건물은 마치 킨포크 매거진에 자주 등장하는 유럽의 어느 가정집을 닮아 있었다. 요즘은 도시생활에 지친 젊은 층들이 자주 스테이케이션을 떠나곤 하기 때문에 숙소의 느낌보다는 포근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려 애썼다. 주로 패브릭 느낌의 소품을 추가하고, 무채색 배경에 그리너리를 조금 더한 정도로 채색을 최대한 줄이고 있었다. 건물의 도면을 잘라서 부분적인 설명을 시각적으로 더 매끄럽게 만드는 동안, 2차원 평면과 3차원 입체를 넘나드는 아이디어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느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이 좋을까? 창가 쪽 아니면 거실 쪽?’
채광이 잘 드는 공간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거실 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묘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그의 손가락보다 더 빠르게, 그의 머릿속 스케치북이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건축과 학생들은 밥먹듯이 쓰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캐드를 다루다 보면 뇌에서도 마치 스페이스를 누르고 마우스를 돌리듯이 이미지가 순식간에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마치 제3의 모니터가 눈을 감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컴퓨터의 렌더링 속도보다 훨씬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풀던 문제 중 그가 제일 좋아하던 문제는 주사위의 도면을 펼쳐 들어갈 점의 개수를 맞추는 문제였다. 다른 문제는 숫자만 나열해서 계산을 해야 하는 반면, 공간적으로 수학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문제를 보자마자, 그의 머릿속에는 동일한 도면이 그림으로 그려졌고, 곧이어 종이가 움직여 다시 합체하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1개의 점이 있는 면의 반대편엔 5개의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은 다른 문제에 비해 유독 도면 문제를 빨리 푸는 그를 보면서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 눈이 아프도록 선이 그려진 도면 속에서도 동서남북의 방면에서 보이는 건물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미대 유학 당시에 만났던 동기 중 한 명은 동양계 학생들은 2차원 예술에 강한 반면, 서양계 학생들은 3차원 예술에 강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입체적인 표현에는 한국 학생보다 미국/유럽계 학생이 강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상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건축과 학생들 중에 끝까지 버텨서 졸업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동일한 반면, 중간에 과를 바꾸어 디자인으로 넘어가는 미국인 친구들이 많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입체적 구현을 해 낼 수 있었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머리가 좋다는 우월감을 남몰래 즐겼는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가던 길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잠시 가게에 들렀다. 문구류 코너를 지나다 보니 조카가 갖고 싶어 했던 캐릭터 수첩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저번에 지민이가 좋아한다던 캐릭터 이름이 뭐였지? … 플라워링? 지금 작업용 펜 보러 왔는데 여기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캐릭터 이름을 듣고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머릿속으로 이름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하며 기억을 하려고 애를 썼다. 동시에 가게 도면이 나온 모니터 앞에서 디자인 문구가 정리되어 있는 장소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도면에서 ㅍ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ㅍ이 아니라 ㄷ으로 시작한다는 걸 다시 머릿속으로 되뇌고 나서야 G코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릿속에 내비게이션을 그리듯 오른쪽으로 먼저 걸어가다가 두 번째 선반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정보를 입력하고 처리하는 작업기억에 같은 언어 영역의 이름이 두 번이나 들어가니 잠시 오작동하듯이 철자가 헷갈렸던 모양이다. 언어가 아닌 시각적인 기억으로 지도를 만들어 머릿속에 그려보니 기억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언어 영역과 시공간 영역을 구분해주는 중앙 집행기가 일하기가 더 쉬워진 것이다. 이렇게 머릿속에 작업기억이라는 인지기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매일같이 일하는 노트북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너무 일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업기억이 좀 느릿느릿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어서 집에 가서 머릿속 스케치북을 깨끗하게 비우고 기분 좋게 영화 한 편을 보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