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디자이너의 마음들]
“일찍 왔네..! 늦어서 미안.”
오늘따라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그의 미소에 그늘이 진 것처럼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저녁을 먹고 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어 그의 여자 친구의 집착이 어제 따라 무척 심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 같이 일하는 동료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투가 심해져서 일하는 시간에도 계속 전화가 온다고 했다. 여자 친구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해보고,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심리학 전공한 친구가 그러던데… 편집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대.”
어렵게 그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의 모습에,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다. 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실 타인의 관계에 있어서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애당초 신뢰가 없는 관계는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분명했다.
어릴 적 신뢰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편집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집착의 경우 질투형 망상으로 이어져, 연인의 애정을 의심하거나 계속해서 확인을 갈구하는 경우가 생긴다. 어쩌면 연인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 라고 하는 명제를 너무 굳게 믿어버린 것이다. 잘못된 믿음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강해지는 그 오해를 걷어내는데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한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조카의 어린이집 친구 중에 잘못된 생각을 굳게 믿고 있었던 아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어릴 적 잠깐 수술을 받은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려 자신이 심장 수술을 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이 심장이 아프기 때문에 달리기를 할 수 없고, 곧 큰 심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어느 영어 캠프에서도 교사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고, 한 교사가 야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사실 심장이 아픈 적이 없었고, 단지 수술을 했었다는 이야기에 자신이 심장이 아프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아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거나, 반대로 그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아이의 믿음은 점점 더 견고해져서 현실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부모님과의 면담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하지만,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망상에 가득 차 일상을 살아가도 일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처럼,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그려놓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못 하고 있는지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너무 비관하거나 너무 우쭐해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지인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 사람들에게 격려를 전해주면서 동시에 현실의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근육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만약 망상이 오래되어 더 긴 시간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현실을 마주했을 때 당사자가 받는 충격이 아마 가장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된 것을 믿었다는 것에 실망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현실이라는 유리창에 비추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살아간다. 잘 못 되었다는 비판을 하기 이전에, 그 세상에 얼마나 들어가 있었는지, 그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먼저 들어주고 물어봐줄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부모의 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자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남자 친구의 모습,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그 관계를 믿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만약 망상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첫마디를 건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틀렸다고 곧바로 지적하기 이전에, 그 아이의 여정을 물어보고 걸음을 되돌아보면서 같이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외로워하는 그 아이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음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아픈 부분에 관심을 갖고 들어주고 싶다.
걸음을 거슬러 올라가 어디서부터 흔들려서 그 믿음을 붙잡게 되었는지 알아보게 된다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여유를 가지고 들어줄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이 우리 주위에 더 많아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