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으로 사라진 기억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by 라벤더
인생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의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100쪽)


토니는 살아온 날들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안 그런가? 라며, 내내 동의를 구한다. 치기 어린 학창 시절, 사랑과 일, 이혼과 은퇴, 고독을 즐기는 토니의 모습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 같다.


# 농담이 일으키는 나비효과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장난스러운 말 한마디로 시작된다. 학교 강당에서 했던 정치적인 농담,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루드비크의 행동은 파국을 맞는다. 후회와 회한의 삶이, 가벼이 건넨 농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과거의 그가 알았더라면. 우리는 인생의 순간순간에 수없이 고민하고 결정한 일들을 후회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루드비크처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어느 날 감금된다. 십오 년 동안 군만두만 먹어야 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말 한마디에서 시작한다. 망각의 말을 기억해 내야 하는 잔인한 운명. 그들의 삶이 낯설지 않은 것은 내가 어딘가에 부려놓은 말들이, 시간의 더께를 뚫고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11쪽)


# 기억의 윤색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노년의 토니는 의문의 편지를 받는다. 베로니카 어머니의 부고소식과 그에게 남겨진 얼마간의 유산과 일기장. 어릴 적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전해주지 않는다. 대체로 잘 살아왔다고 믿었던 토니의 삶을 흔들어놓는 사건들, 망각 속에서 소환된 과거의 진실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기억의 윤색이란 얼마나 빈약한지. 같은 시공간에서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으로 소환된 기억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다. 유리한 부분을 이어 붙인 자기중심적인 기억들. 어쩌면 기억은 자기 합리화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조금 삐딱하고 좌충우돌하는 사춘기를 겪어내는 토니와 친구들은 지극히 평범하며, 과거는 현재처럼 평화롭다. '생존 본능, 혹은 자기 보존 본능(76쪽)'으로 편집된 기억, 시간과 망각의 틈으로 사라진 행동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며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잊는다.


# 자기만의 용서

아이를 유괴, 살해한 자가 교도소에서 신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 한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신앙의 힘으로 용서의 마음을 내었던 엄마는 십자가 아래에서 오열한다. 죄책감을 벗어던진 해말 간 얼굴을 용서할 수 없다. 교회의자를 사납게 두드리며, 피해자도 아닌 그 누가 용서를 거론하냐며 불가능한 용서와 죄 사함을 저주한다. 영화 <밀양>은 "자기만의 용서"를 묵직하게 다룬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영화화되었다. 결말은 소설보다 밝고 희망적이다. 고집불통의 노인은 집배원에게 물을 권하고, 이혼한 전부인 말에 귀 기울인다. 타인의 인생을 전복시킨 망각의 말이 회한을 넘어 변화를 이끌었다는 설정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삶이란 모호함과 오류 투성이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소설의 결말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 토니에게서 나를 발견하다

읽어가다가 마지막 반전에 놀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단어와 문장이 다른 느낌으로 살아난다. 말의 찌꺼기들, 부유하며 기억의 윤색을 도왔던 묵은 먼지들. 내가 털어냈던 것들이 어디선가 뿌리를 내려 영영 떨어지지 않는 기억이 된다면, 한마디의 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나는 또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무심코 던졌던 말 한마디, 눈빛, 행동들이 망각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할지, 나는 베로니카의 말처럼 여전히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단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27쪽)' 학창 시절 토니의 시기와 질투, 선망의 대상인 에드리언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할 만큼 철학적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묻는 선생님에게도 단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15쪽)', 그 이상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106쪽)' 그가 줄곧 인용했던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말했다. 수많은 사실 중에 역사가가 숨을 불어넣은, 주관적 해석이 개입된 역사가 기록되고 전승된다면, 역사적 사실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사회적 영향을 배제한 채 역사가가 독단적으로 특정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토니 개인적 삶에서 기억이 얼마만큼 왜곡될 수 있는지, 개인을 넘어 역사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는 역사가 과연 진실인가,라는 철학적 테제를 개인의 삶으로 끌어와 시간, 기억, 망각과 버무려 멋진 이야기를 만들었다. 짧지만 생각의 실타래를 무한정 풀어내는 이야기다. '빠르다 싶을 만큼 우리에게서 멀어져 시간과 역사의 틈새 속으로 사라져 간(97쪽)'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시간이 정착제가 아니라 용해제라는 걸 안다면(111쪽)' 기억에 진실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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