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서재 구석에서 어둠과 만나는 어린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훗날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회상한다. 그때부터였구나. 한강작가가 어둠의 심연을 만들어간 것은. 5.18에 즈음하여 "소년이 온다"를 읽고, 연달아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출구 없는 어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이북을 용기 내어 읽었다. 읽어낼 용기조차 없는 비루한 삶이라니. 한강작가의 맨부커상 소식이 들린다. 문학가 전체의 성취인 듯 들썩이는 가벼움을 잠재우는 작가의 진중한 소감은 참 한강스럽다.
냉철하고 눅진한 감성으로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는 무겁고 우울하다.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삶과 죽음, 열정과 냉정, 고통과 치유라는 가치의 경계에 대한 집요한 물음들. 다른 시점으로 전개되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중편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장편으로 완성된다. "고통의 직시"가 "이해와 치유"로 변해가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 채식주의자, 선과 악의 경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녀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평균적인 삶에 알맞은 부속품이었던 아내였기에 영혜의 갑작스러운 채식과 불면은 남편에게 불편한 일이다.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애초부터 사랑과 이해의 상대가 아니었기에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한 영혜는 회피의 대상이다. 아내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꿈과 고통의 심연은 궁금하지 않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학대에 무기력하게 적응했던 영혜의 삶은 곧 결혼생활마저도 "척하는 삶"을 만들었다. 억압에 침묵으로 대응했던 그녀가 꿈을 계기로 저항하며 일상의 균열은 일어난다. 뼈에 고착되어 버린 폭력성의 근원을 뽑아버리기 위해 그녀는 "자기 파괴"를 선택한다. 동물성을 제거한 식물화되어 가는 삶. '모든 사람이---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 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은 동물뿐이 아니다. 영혜는 브래지어라는 관습의 억압조차 거부한다. 손, 발, 이빨과 세 치 혀, 시선.... 다수의 관습이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가하는 폭력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계를 벗어난 것들은 비정상과 악으로 치부되고 이해의 시도조차 거부된다. 관습의 억압에 순응하지 않는 영혜는 경계밖으로 밀려난다. 가족과 사회의 폭력들은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날 선 질문들을 던진다.
# 몽고반점, 열정과 냉정의 경계
"영혜는 뭐, 스무 살까지도 남아 있었는걸" 하고 뜻 없이 말하지 않았다면.
단단할 것만 같았던 일상에 말 한마디는 균열을 일으킨다. 성공적인 삶의 외피를 두른 그녀의 삶은 그리 견고하지 않다. 진정한 예술에 목말라하던 남편과의 괴리감은 공허함으로 자리 잡고, 그 공허함을 성실로 채워보지만 괴리감은 커져만 간다. 거죽뿐인 삶. 동생의 몽고반점은 남편의 예술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고, 열정의 가속은 일상을 소진해 버린다. 결국 부자연스러운 삶은 허울뿐인 외피를 찢고 고통스러운 민낯을 드러낸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 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나무불꽃, 고통과 치유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 가을 다섯 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고, 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고통에 저항하는 동생 영혜가 차라리 부럽다.
최선과 배려만으로 견뎌왔던 삶은 껍데기뿐이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살아있는 삶"이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욕망을 감춘 채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타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버겁기만 하다. 영혜가 넘어버린 경계는 묵묵히 인내의 짐을 감당하는 그녀의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견뎌내는 형벌 같은 삶. 암흑 속으로 침잠하는 삶에 그녀의 존재감은 삭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살기 위해 성실이라는 비겁함을 선택했고, 동생의 고통을 방관했고, 비정상의 외피를 씌워 이해의 경계밖으로 내몰았다. 우리가 절대 선이라고 믿는 것들이 과연 있을까? 절대 선이라고 믿는 것조차 심각한 오해이며 비루하기 그지없다. 날 선 고통들과 직면하며 동생을 이해하고, 비어있는 삶에 존재감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다. 비로소 자신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 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9년 전 글 #한강 작가와의 신기한 인연 #서평 #전작주의작가 #8년 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나는 그 해 11월 북샵라벤더 책방지기가 되어 작가의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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