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를 떠나 모스크바로
떠나는 날 새벽. 직원이 거주등록증을 프린트하는 동안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한 우유와 오트밀에는 날짜와 함께 ‘FREE’라는 단어를 적어 붙였다. 때때로 음식들을 들고 가지 못하는 상황일 때 이런 나눔들은 아주 바람직한 일인 것 같다. 무거운 짐 하나를 계단 아래에 내려놓고, 거주등록증을 받아 지갑 속에 넣었다. 다시 한번 빠뜨린 건 없는지 둘러보다가 꼭 알아 가야지 했던 에어 프레셔너air freshener의 향기가 생각났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은은하고 풋풋한 향기가 났었는데, 도무지 언제 어디서 맡아본 향기였는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을 골똘해져 있었다. 에어 프레셔너에 적힌 향기의 이름은 ‘포슬레 도즈댜ПОСЛЕ ДОЖДЯ’,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 내린 후’였는데, 혹시라도 그냥 떠났으면 호스텔에 메일까지 보낼 뻔 했다. ‘저기 화장실에서 나던 방향제의 향기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하고. 나라면 충분히 그랬을 지도. 메일 받는 사람의 어이 없는 표정이 상상이 된다. 사실 그 방향제를 사오고 싶었는데 그 향기를 맡으면 또 계속 기억해내느라 애쓸 것 같아서 사지 않았다. 남은 짐을 마저 챙기고 아래로 내려가 철문을 열었다. 얼얼하고도 시린 공기에서 새로운 모험의 맛이 났다. 밖은 아직 깜깜했다. 올드팝이 나오는 택시를 타고 창밖의 네온 사인들을 더듬더듬 읽다보니 어느새 공항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국내선 청사 2층에 있는 대합실로 올라갔다. 밖은 여전히 깊은 인디고 블루, 가만히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저기 하늘 가운데 자몽빛 지평선이 그어졌다. 도모데도보Домоде́дово 공항으로 가는 S7 항공 777편은 9시 5분에 탑승 시작, 9시 35분 출발이었다. 푸른 어스름 사이로 눈 쌓인 항공기와 활주로가 드러났다. 아침이 오려 할 때의 빛과 색은 정말 황홀하다. 활주로 너머의 집들, 노란 불빛들, 피어오르는 굴뚝의 따스한 연기와 오버랩 되어 비치는 청사 유리창 안팎의 풍경들.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순간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모든 순간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대기하고 있던 수송버스를 타고 항공기를 타러 갔다. 황금빛 햇살이 번져왔다. 이륙과 동시에 또 이어지는 감탄사. 하늘에서 본 시베리아는 또 한번 황홀한 설국이었다. 한 시간 쯤 날았을까? 창밖으로 하얗게 변한 거대한 강과 식물의 뿌리처럼 뻗은 강줄기가 보였다. 그 모양은 마치 눈(雪)으로 그린 고사리 화석 같았는데, 페트라Petra─요르단 남부의 고대도시─의 바위산 위에서 본 고사리 화석, 딱 그 모양이었다. 지도를 보니 크라스노야르스크 아래에 있는 예니세이강Енисе́й─몽골에서 발원하여 북극해로 흘러드는 큰 강─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