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이 고로드를 향하여
나는 붉은 광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상업지구인 키타이 고로드Kitay-gorod에 숙소를 구했다. 첫날 그 숙소를 찾아가는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타고 파벨레츠카야Paveletskaya 역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수월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슬프게도 모스크바의 지하철 미뜨로Метро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날 나의 이동에 대한 메모는 이렇다.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법
공항 - 파벨레츠카야Paveletskaya 하차 (아에로익스프레스 40분 소요)
지하철티켓 1회권 55루블 구입하기
2호선(Khovrino 방향) 타고 1 정류장 노보쿠즈네츠카야Novokuznetskaya 하차
6호선(Medvedkovo 방향) 트레치야코프스카야Tretyakovskaya역에서 환승하여 1 정류장 키타이 고로드Kitay-gorod역 하차
마로세이카 거리Ulitsa Maroseyka 6번지의 출구로 나오기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지하의 에스컬레이터는 깊디 깊고 또 속도도 엄청났다. 처음에 캐리어를 들고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가 왠지 넘어질 것 같아서 다시 뒤로 물러났다. 어떤 남자가 먼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을 서 있었을 것이다. 무사히 첫 에스컬레이터를 경험했지만 나의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계단으로 캐리어를 올려야 했는데, 캐리어를 포함하여 짐이 세 개나 되니 꽤 버겁긴 했다. 캐리어를 먼저 올려두고 다시 내려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 계단 위까지 올려다 주었다. 그런 상황을 몇 번 경험한 후에야 숙소 부근의 마로세이카 거리Ulitsa Maroseyka에 무사히 닿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지하철역은 같은 역이라도 노선에 따라 출구 이름이 서로 다르다. 서울의 지하철을 예로 들자면, 고속터미널역에는 3호선, 7호선, 9호선이 만나지만 역 이름은 고속터미널역으로 하나다. 모스크바의 경우 같은 역이라고 해도 노선별로 출구 이름이 달라진다. 1호선과 6호선, 10호선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에는 출구 이름도 세 개다. 그래서 1호선을 타려면 치스티예 프루디Chistye Prudy역을, 6호선을 타려면 투르게네프스카야Turgenevskaya역을, 10호선을 타려면 스레텐스키 불바르Sretensky Bulvar역을 각각 이용해야 한다. 타기 전에는 과연 헷갈리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색깔별로 구분이 잘 되어 있고 표지판도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어 이런 부분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키타이 고로드역을 빠져 나와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가로등마다 달린 볼 장식과 눈 쌓인 정교회 성당의 지붕과 종탑이었다. 거리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나의 시련도 아직 남아 있었다. 역의 출구 앞에 서서 걸어갈 방향을 정한 다음 횡단보도를 건넜다. 숙소는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이곳 또한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3층이라니! 한숨이 나왔다. 우선 짐 하나만 먼저 들고 올라가 체크인을 했다. 그러는 동안 직원의 부탁으로 장기 거주자로 보이는 남자가 내 가방을 들고 올라와 주었다. 정말 감사했다. 내가 묵을 곳은 8인실로 침대가 딱 두 개 남아 있었다. 하나는 2층, 하나는 1층이었다. 1층은 문 바로 옆에 있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1층을 택했다. 침대 위에 짐을 대충 풀어놓고 부엌으로 갔다. 긴 창이 있는 아담한 부엌에는 원목의 싱크대와 몇 개의 결이 살아 있는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크래커를 가득 담아 놓은 커다란 유리볼이 올려져 있었다. 천장에는 서로 다른 모양의 조명들이 11개 정도 달려 있고, 의자들도 풀색, 겨자색, 곤색 등으로 모두 색깔이 달랐다. 싱크대 위 선반에는 오트밀과 쌀, 파스타, 커피, 월계수잎 등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바나나 껍질 위에 ‘FREE’라고 적어둔 걸 발견하고 홍차 한 잔을 곁들여 먹었다. 이어서 욕실 구경. 마치 집 보러 온 사람 같았지만, 공간 구경은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화이트톤에 원목 인테리어로 욕실 또한 깨끗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통유리창으로는 키 큰 나무와 베이지색의 건물이 보였는데, 가만히 서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 가 본 적 없는 폴란드와 쇼팽의 음악이 떠올랐다.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의 시차는 5시간. 이미 잠들었어야 할 시간에 모스크바는 아직 초저녁이라 조금 피곤했다. 시차 적응을 위해 조금 참기로 하고 주변의 마트를 검색했다. 5분 거리에 매그놀리아라는 수퍼마켓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생선을 그리며 젖은 거리를 걸었다. 걷는 내내 세련된 카페와 이국적인 레스토랑들이 많이 보였다. 냉동 코너에서 아가마AGAMA라는 브랜드의 냉동 대구 400g을 골랐는데, 우리돈으로 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미니 오이 300g, 방울토마토 250g, 양파 2알, 우유 500ml, 매쉬드 포테이토 하나, 바나나 1개, 오렌지 1개, 초콜릿 하나, 껌 한 통까지 모두 해서 989.33루블(약 18,200원)이 나왔다. 돌아와 대구살 두 덩이와 양파를 굽고, 뜨거운 물을 부워 매쉬드 포테이토를 만들었다. 방울토마토와 오이도 깨끗이 씻었다. 찬장을 열어보니 색색깔 접시들도 많았는데 하늘색 플레이트로 골랐다. 냉장고에 ‘FREE’ 레몬이 보여 레몬티도 만들었다. 비록 스테인레스 프라이팬을 급히 달구어 굽느라 생선살이 좀 눌러 붙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저녁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