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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feng Nov 16. 2019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나는 어서 붉은 광장을 보고 싶었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키타이 고로드역을 지나자 붉은 카네이션과 하얀 카라 화환이 놓인 기념물이 눈에 띄었다. 찾아보니 플레브나Plevna 전투(1877~1878)에서 희생 당한 러시아 유탄병들을 위해 세운 기념 채플이었다. 플레브나 전투는 러시아와 루마니아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싸운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전쟁으로, 플레브나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불가리아 북부에 있는 플레벤Pleven이라는 도시였다. 궁금한 게 많으니 걷는 속도가 더딜 수 밖에 없다. 일일이 다 알아볼 수 없으므로 그럴 때는 메모를 해 두고 나중에 찾아본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면 오히려 더 공부할 게 많아진다. 나는 역사보다는 지리를 좋아하는데 고교 시절 세계지리를 공부하고 싶어서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참고서를 사 두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세계지리’라는 단어에는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물론 그 전에는 마르고 닳도록 사회과부도를 넘겼고 매일같이 지구본을 돌렸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을 지정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라도 틈틈이 참고서를 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른 과목이 뭐였는지 왜 기억이 안 나는걸까? ‘법과 정치’였던가? 기억나지 않으니 별로 안 좋아했던 게 분명하다.







키타이 고로드역을 사이에 두고 거리는 마로세이카 거리와 일린카 거리Ulitsa Il’inka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일직선 상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일린카 거리의 건물들은 더 아름다웠다. 채도가 낮은 민트색 건물은 고풍스러운 모양의 창문과 어우러져 작은 에르미타주 궁전 같았다. 그 뒤에는 레몬색 건물이, 그 뒤에는 살구색 건물이 차례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러시아 사람들의 색에 대한 감각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아름다운 색들을 감상하고 있자니 1964년에 나온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붉은 광장이 코 앞에 보였지만, 내 발길은 이미 멈춰 있었다. 눈송이가 점점 더 굵어지기도 했고, 마침 눈 앞에 러시아 최대 백화점이 굼ГУМ(GUM) 이 있었다. 모자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시큐리티 게이트를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굼은 1893년에 문을 열어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민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의 이름은 국영 백화점 혹은 국가 백화점이라는 뜻의 고쑤다르스트베니 우니베르살니 마가진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이었으나 지금의 이름은 종합 백화점 혹은 주요 백화점이라는 뜻의 글라이니 우니베르살니 마가진 Глав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이었다.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이니셜이 같아서 그대로 ‘굼’이었다. 흔히들 굼 백화점이라 하지만, ‘굼’은 이미 백화점의 뜻을 지니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에도 굼이 있었는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는 백화점들과는 달리 아케이드 형식이라 아울렛 등의 쇼핑몰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다. 상점마다 달린 오크색의 나무 문 때문에 더 클래식한 분위기였는데 안에는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중간 중간 앉을 수 있는 벤치들도 많고 볼거리도 넘쳤다. 꼭 쇼핑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들어오는 아치형의 천장과 전체적인 공간의 느낌은 역을 개조해서 만든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닮아 있었다. 



꼭대기 층에 스톨로바야Stolovaya 57이 보였다. 스톨로바야는 러시아의 서민 식당인데 쉽게 말해 셀프 서비스 카페테리아다. 블라디보스톡 여행 중에도 이름이 다른 몇 군데의 스톨로바야에 들러 식사를 했었다. 쇼케이스 안에 든 다양한 음식들 중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식판 위에 고른 후 계산하고 먹는 방식인데, 굼 안의 스톨로바야는 좀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아침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또 먹기로 했다. 선택 장애가 있는 나는 진열장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치킨 크로켓과 비트 샐러드, 초콜릿 케이크와 카푸치노를 골랐다. 가격은 우리돈으로 8천 얼마 정도가 나왔다. 창가 자리는 이미 다 차 있어서 중간 자리에 잠시 앉았다가 사람들이 일어나는 틈을 타서 자리를 옮겼다. 수트를 입은 회사원들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혼자 온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금발의 중년 여성에게 비어 있는 내 앞자리를 내어 주었다. 낯선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식사를 했다. 물론 대화도 나누었다. 그녀가 떠난 후에는 또 다른 여인이 와서 식사를 하고 떠났다. 음식들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초콜릿 케이크는 상상하던 진한 맛이 아니라 아쉬웠다. 그래도 풍경과 분위기는 근사했으니 충분히 만족스런 식사였다. 나오는 길에는 화장실을 가려고 했는데 무려 천원에 가까운 금액에 놀라 조금 참아보기로 했다. 







드디어 붉은 광장으로 갔다. 붉은 광장은 러시아어로 크라스나야 플로샤디Красная площадь라고 하는데, 러시아인 친구 A에 따르면 옛날에는 크라스니красный라는 단어가 ‘붉은’ 혹은 ‘아름다운’의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색깔을 가리킬 때만 쓰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데, 다만 몇몇 표현, 예를 들어 '좋은 가격’이라는 뜻의 ‘크라스나야 체나красная цена’나, 조금 구식의 표현이지만 ‘아름다운 소녀’라는 뜻의 ‘크라스나 데비차красна девица’ 정도에는 일종의 관용구처럼 사용을 한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의 ‘아름다운’이나 ‘멋진'에 해당하는 형용사는 ‘크라시위красивый’였다.



갑자기 눈이 더 펑펑 쏟아졌다. 그 틈을 타 모두들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기념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 때 한 중년 부부가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영국 옥스포드에서 온 관광객이었는데 얼굴에서부터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오늘 밤 횡단열차를 타러 가요.”



이 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 준비했을 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부인은 내 부츠를 가리키며 신발이 똑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부인의 부츠는 나와 똑같은 브랜드,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이패드로 부부의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기념사진을 찍지 않는 나이지만 내 사진도 한 장 부탁해서 찍어두었다. 



꿀을 발라둔 것도 아닌데 나는 계속 성바실리 성당과 역사 박물관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눈도 내리고, 목마와 그네는 쉬지 않고 돌고, 곳곳에 놓인 수많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구들은 눈길 닿는 곳마다 반짝여서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궁전 같은 굼 건물도 전체가 노란 전구들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나 추운지 핸드폰을 켜면 그냥 꺼져 버렸는데, 그럼에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써 발걸음을 뗀 후에는 또 무작정 길거리를 걸었다. 사실 이렇게 추운 날은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나 코코아를 마시면서 멍하니 있는 게 제일인데, 사진이 뭐라고 참. 







계속 걷는데 마술처럼 하늘이 갰다. 얼른 다시 붉은 광장 쪽으로 걸어가서 또 사진을 담았다. 마치 조명이라도 켠 듯 아까와는 전혀 다른 하늘이었는데, 하늘만 달라졌는데도 완전히 다른 곳에 온 기분이었다. 크렘린 궁전 뒤로 석양빛을 머금은 구름이 동동 떠다녔다. 



이제 걸을 만큼 걸었으니 숙소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다. 성 바실리 성당 뒤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저 멀리에 스탈린카 빌딩 하나가 보였는데, 뭔가 찾아보니 코텔니체스카야 제방 빌딩Kotelnicheskaya Embankment Building이었다. 176m 높이의 32층짜리 건물로 모스크바의 세븐 시스터즈─스탈린 양식으로 지어진 일곱 개의 초고층 빌딩들─중의 하나였다. 물 빠진 듯한 하늘에 드라마틱한 구름이 피어 올랐는데 자세히 보니 구름이 아닌 근교의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전구옷을 입은 가로수들이 길 위에서 반짝거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주황색의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눈을 쓸고 있었다. 



얼마 못 갔는데 또 궁금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학교인가 싶어 들어갔더니 실내는 아레나 모양이었다. 체육관인가? 뭐지? 그런데 둘레에는 회랑을 따라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곳의 이름은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였다. 고스티니 드보르는 러시아에서 실내 시장이나 쇼핑 센터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용어로, 러시아의 여러 도시들에는 오래되고 큰 쇼핑 센터인 고스티니 드보르가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세계 최초의 쇼핑 아케이드인 그랜드 고스티니 드보르가 있다. 건물 모양이 말레이시아 말라카와 페낭에서 보았던 숍하우스들과도 비슷했는데 공통점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었다. 



고스티니 드보르 안에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무료 화장실이었다. 급할 때는 유료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몇 푼 안 되는 돈이 왜 그리 아까운지. 여행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건 우리나라만큼 화장실이 잘 되어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무료에 깨끗하고 어떤 곳은 음악까지 흘러 나오고, 또 어떤 곳은 파우더룸까지 갖추고 있고. 두 개의 엄지로도 부족하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더 둘러보는데 사진전 포스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른 시선 - 19세기와 20세기의 입체사진술Stereo Photography에 담긴 러시아와 세계’라는 제목의 전시였다. 하필이면 그날이 월요일이라 전시가 없었다. 다시 오기로 하고 핸드폰으로 포스터만 찍고 나왔다. 나와서 보니 그곳은 아까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엷은 소라색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굼 근처였다. 여러 개의 문 중에서 반대편의 문으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붉은 광장으로 가서 어둠이 내린 밤을 구경하다가 굼으로 들어가서 누구나가 먹는다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캬라멜 맛으로 골랐는데 정말 누구나 먹어보고 싶을 만큼 진한 맛이었다. 하나 더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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