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Mayfeng Nov 16. 2019

모스크바에서 모로코를 꿈꾸다






미술관 가는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푸른 눈의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유모차 위에 누워 분홍색 토끼 모양의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동요를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하트가 콩콩 박힌 아이의 모자는 3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보였는데, 길쭉한 꼬깔 모양으로 마법사 같기도 하고,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Djellaba 같기도 했다. 나는 어떤 그림 하나를 보기 위해 푸쉬킨 미술관Pushkin Museum of Fine Arts을 찾아가고 있었다. 1호선으로 갈아타려면 아르바츠카야역Arbatskaya에 내려야 했는데, 거기서 음악 소리 때문에 또 발걸음이 멈추었다. 비록 갈 길이 멀어 아주 잠시 서 있었지만, 진지한 예술가의 연주는 하루 내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가 연주한 곡은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2 Violins in A minor, RV 522>이었다. 



크로포친카야역Kropotkinskaya에 내려 2-3번이라고 적힌 출구로 나갔다. 볼콘카 거리Volkhonka Street로 연결되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바로 뒤에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의 황금돔이 보였다. 100미터가 조금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방 정교회 성당이었다. 공사 중인지 건물 아래에는 하얀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때가 오후 2시 경이었는데 젖은 거리 때문인지, 낮은 기온 때문인지, 오후보다는 이른 아침 출근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황금돔과 대각선 방향에 모던한 베이지색의 건물이 보였다. 고갱 탄생 170주년이라는 문구가 키릴어로 적혀 있었고 배경은 고갱 그림의 일부분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에서 바로 이어지는 아치형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푸쉬킨 미술관의 신관이었다. 구관은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그 옆에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신관은 19세기와 20세기의 유럽과 미국 미술을, 구관은 더 오래된 미술품들, 그러니까 이집트나 그리스 시대의 것들부터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구관이 있다는 건 신관을 다 감상한 후에야 알았다. 배가 고파 구관 구경은 못했다.  












핑크빛 작업실




400루블을 내고 티켓을 산 후 클락룸에 코트를 맡겼다. 가방은 사물함에 넣어야 했는데, 번호가 적힌 검은색의 사물함은 안이 훤히 다 비치는 투명 유리였다. 처음에는 신선한 기분이 들다가 계속 보니 왠지 납골당 같기도 했는데 검은 백팩, 흰색에 핫핑크 무늬가 들어간 비닐봉지, 베이지색의 종이가방 등, 저마다 다른 구겨짐의 모양을 하고 칸칸이 들어 앉아 있어서 어찌 보면 또 설치 미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1층에는 티켓 오피스와 뮤지엄숍, 카페, 사물함, 클락룸, 화장실 등이 있었고, 전시실은 2층부터였는데, 고흐와 고갱을 비롯하여 모네와 세잔, 드가, 르누아르, 로트렉 등의 주로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이 2층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미 프랑스나 영국, 덴마크 등지를 여행하며 자주 마주해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또 어찌 보면 작품들은 예술가의 자식인데, 전 세계에 서로 흩어져 있으니 문득 이산가족 같아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3층으로 올라갔다. 두 개의 방을 거쳐 20번 방에 들어섰을 때, 내가 보고 싶었던 그 그림─<핑크빛 작업실, The Pink Studio, 1911>─이 눈 앞에 보였다. 그런데 관람객은 아무도 없고, 오직 나와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여성 관리인이 전부였다. 꿈 같았다. 그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년 전 어느 새벽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마티스를 검색했고, 그렇게 그의 그림들을 처음부터 하나씩 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 그림을 그동안 본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파리에서도, 니스에서도, 또 에르미타주에서도 마티스의 여러 그림들을 보았었고, 미술관의 숍들에서 그림들을 사오기도 했었는데, 도대체 이 그림은 어디에 있는 걸까? 



소장처는 모스크바의 푸쉬킨 미술관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모스크바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그저 낯설기만한 도시였다. 그러니 모스크바에 간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는데, 나는 모스크바에 왔고,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아. 이 색들.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라벤더 색의 벽지에 복숭아 색의 카페트, 화려한 꽃무늬의 패브릭과 병풍, 터키쉬 블루의 조그만 항아리, 창 밖으로 보이는 연두와 초록 그리고 작업실 곳곳에 놓이고 걸린 작품들과 소품들까지. 당장 이 크기 그대로 집에 걸어두고 싶었다. 아 그런데, 이걸 혼자서 감상하고 있다니, 속으로 계속 말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마티스가 모로코에서 지내다가 파리로 돌아온 후에 파리 남서부의 이시 레 물리노Issy-les-Moulineaux에서 그린 작품이었다.








색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Color was not given to us in order that we should imitate Nature.

우리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It was given to us so that we can express our own emotions. 

앙리 마티스





핑크색 그림 왼쪽으로는 <작업실의 코너 Corner of the Artist's Studio, 1912>가, 오른쪽으로는 <한련화와 ‘춤’ 회화 Nasturtiums with the Painting ‘Dance’, 1912>이 걸려 있었는데, <한련화와 ‘춤’ 회화>라는 작품은 미장아빔Mise en abyme:작품 안에 작품을 집어넣는 예술적 기법의 방식으로 제목 그대로 꽃병 뒤에 마티스의 유명한 <춤 II, Dance II, 1910> 회화가 그려져 있었다. 마티스는 이 구도로 두 장을 그렸다는데, 하나는 푸쉬킨 미술관에 다른 하나는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소장되어 있었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은 아직 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검색을 해서 보니 푸쉬킨 미술관 소장 작품이 좀 더 강렬한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 <춤 II, Dance II, 1910>는 2014년 겨울에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보았는데, 그 또한 두 점으로, 초기 습작인 <춤 I Dance(1), 1909>은 뉴욕의 모마 소장이었다. 





<춤 II, Dance II, 1910>











<카스바 게이트(성문), The Casbah Gate, 1912-1913>





모스크바에서 모로코를 꿈꾸다



어떻게 러시아에는 이런 작품들이 많을까 궁금하던 차에 세르게이 시츄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6)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제정 시대에 섬유 사업을 하던 대부호이자 아트 콜렉터였다. 마티스의 <춤 II, Dance II, 1910>은 바로 이 사람의 의뢰로 그려진 작품이었다. 그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루브르나 다른 대형 미술관들에게 인기가 없는 예술품들 위주로 수집했는데, 대부분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마티스, 드랭, 피카소, 고흐, 고갱, 시냑, 루소, 로트렉,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었다. 그의 콜렉션은 볼셰비키 정부에 몰수 되었다가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에 나뉘어져 전시되고 있었다. 



그 방에 있는 다른 그림들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소재와 색감을 담고 있었는데, 특히 <모로코 3부작 Moroccan Triptych>은 모로코를 향한 나의 유랑의 피를 다시 끓게 만들었다. <탕헤르의 창밖 풍경, Landscape Viewed from a Window. Tangier, 1912-1913>과 <테라스의 조라, Zorah on the Terrace, 1912-1913> 그리고 <카스바 게이트(성문), The Casbah Gate, 1912-1913>가 그것이었다. 



마티스의 모로코 여행은 이반 모로조프의 의뢰를 받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모조로프Ива́н Абра́мович Морóзов(1871-1921) 또한 시츄킨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근대 회화들을 수집한 인물이었다. 마티스는 탕헤르에 가기 전에 그들─시츄킨과 모조로프─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전혀 모르고 떠나온 여행에서 모스크바와 마티스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되다니, 뭔가 추리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과 방스의 로자리오 성당Chapelle du Rosaire 또한 다녀왔기 때문에 기분이 더 남달랐는지도 모르겠다. 



마티스 부부는 1912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쳐 모로코 여행을 했는데, 첫 여행의 시기가 1월 말 경의 우기였다고 한다. 첫 주를 보낸 마티스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1874-1946)에게 이런 편지─“모로코에서 과연 태양을 볼 수 있을까요? Shall we ever see the sun in Morocco?"─를 보냈다는 오랜 신문 기사를 읽고 웃었다. (1990년 3월 18일 뉴욕 타임즈 37페이지) 얼마나 햇살이 절실 했는지 짐작이 간다. 첫 2주 내내 비가 내렸다는데 그래서 거의 호텔에만 갇혀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마티스의 모로코 여행에 나의 인도 여행이 오버랩 되었다. 물론 나는 일부러 우기를 선택해 떠났고, 붓이 아닌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나 역시도 햇살이 절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춥기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으니까. 









<탕헤르의 창밖 풍경, Landscape Viewed from a Window. Tangier, 1912-1913>





마티스에게 모로코는 ‘외부 환경과 내면의 삶이 더욱 완벽하게 일치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시카고 트리뷴지, 미술평론가 알란 지 아트너Alan G. Artner) 내게는 그런 곳이 어디일까?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바다가 있는 곳일 것이다. 마티스는 그 두 번의 여행 모두 빌라 드 프랑스Villa de France라는 호텔의 35호실에서 지냈는데, 그 호텔은 아직도 손님을 받고 있는 모양인지, 론리플래닛에 소개가 되고 있었다. 모로코 3부작 중의 가운데 테라스의 ‘조라’라는 여인은 그 호텔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테라스의 조라, Zorah on the Terrace, 1912-1913>




알제리의 티파사와 함께 내가 꿈꾸고 있는 곳도 모로코의 탕헤르다. 티파사는 카뮈Albert Camus(1913-1960) 때문에, 탕헤르는 매그넘 사진가 브루노 바르베Bruno Barbey(1941-)의 사진들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1995년 탕헤르에서 찍은 사진이 결정적이었다. 핑크빛 돌담과 집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 사람이 젤라바Djellaba를 입고 걸어 내려가는 사진이었는데 그 길 끝에는 희끗한 파도가 넘실대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지브롤터 해협이 있었다. 나도 카메라를 메고 저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실 악 소리가 나올 만한 그런 풍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한 곳도 아닌, 그저 이름 모를 마을의 한 귀퉁이일 뿐이었는데 왜 나는 그런 쓸쓸한 풍경들에 끌렸는지, 그리고 끌리는지, 왜 나는 어떤 공백이 느껴지는 음악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지. 그런 풍경들을 볼 때면 이지형의 <봄의 기적>이라는 앨범이 떠오른다. 정말 많이 들었던 앨범인데, 분위기도 가사도 멜로디도 모두 좋다. 특히 ‘내가 없는 하루’라는 곡을 들을 때 느껴지는 쓸쓸함이 정말 좋다. 당장 어디서라도 쓸쓸해지고 싶을 때는 그 음악을 찾아 듣는다. 중세의 유명한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1304-1368)도 탕헤르 출신이었는데,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아직은 꿈만 꾸어도 좋다. 내가 바라는 것은 건강과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이 창작이라는 것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술은 위로이면서 영감이 된다. '예술가의 임무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에 대한 해독제를 찾는 것’이라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위로, ‘예술가의 일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자신의 예술로 곧고 뚜렷한 선을 긋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베일즈David Bayles와 테드 올랜드Ted Orland의 위로, 그 밖에도 헤세, 니체, 카뮈, 그르니에, 지드……. 그리고 음악의 위로, 풍경의 위로, 시의 위로, 문학의 위로, 그림의 위로……. 정말 많은 위로가 곁에 있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이 그리움들을 차곡차곡 잘 포개어 두었다가 언젠가 아코디언을 펼치듯이 내 짝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의 고백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그 날은 참 이상한 하루였다.

하루 내내 모로코가 따라 다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술관을 떠나 마야콥스카야역으로 갔고

사진을 찍으려고 서 있는데

내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길쭉한 모자를 쓰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