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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feng Nov 16. 2019

챠가 어드벤처





챠가 어드벤처





“너무 춥죠?”

“너~무 춥네요.”



우리 둘 다 볼이 발그레져 있었다. 나스티아는 들고 온 연갈색의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었다. 꽤 묵직한 게 밀가루나 설탕 몇 봉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추운 날 여기까지 들고 온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용을 건네고 영수증을 받았다. 뭔가 미션을 완료한 기분에 흐뭇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 안에는 내가 이 여행을 떠나온 중요한 이유 하나가 들어 있었다. 



‘챠가чага’였다. 흔히 차가버섯이라고 불리는 차가는 자작나무에 자라는 기생 버섯인데, 버섯이라고 하지만 바이러스에서 시작된 균류에 더 가까웠다. 북위 45도 이상의 추운 지역─시베리아와 캐나다 북부, 북유럽 등지─에서만 서식하며 자작나무의 모든 영양분을 다 빨아먹고 사는데 그래서 자작나무의 암이라고도 불렸다. 








차가를 알게 된 건 3년 전이었다. 아빠는 당시 전립선암 판정을 받으셨다. 현재는 환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고 계시지만물론 여전히 환자이긴 하지만─그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수술 조차도 불가능한 4기였다. 다른 암에 비해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내일 당장 아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빠는 나를 터미널에 데려다 주시며 작별 인사까지 하셨었다.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라고. 그 때 아빠의 ‘일방적인’ 인사는 어떤 이별 노래보다 슬펐다. 아빠는 가족과 상의 끝에 항암 대신 자연 치유로 방향을 정하셨다. 좋아하시던 술을 단번에 끊으시고 자연식과 건강식 위주로 드시며 운동을 병행하셨다. 당시 우리 가족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빠의 건강이었는데, 나와 동생들은 <암덩어리 똥덩어리 만들기방 - 일명 암똥만호>라는 이름의 그룹채팅방을 만들어 어떻게 하면 아빠가 스트레스를 덜 받으시고, 더 건강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정보를 찾았다. 영화를 공부하다 정치와 경영으로 전공을 바꾼 남동생은 전공과도 전혀 상관없는 외국 논문까지 찾아가며 암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다 암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면역력이며, 면역력에 좋은 음식 중에 하나가 러시아산 차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곳 농민들이 찻값을 아끼려고 차가를 끓여 마신다는 걸요.”
“정확히 말하자면 자작나무의 버섯이 아니라 자작나무의 암이야. 자작나무 고목 표면에 혹처럼 붙은, 겉은 검고 속은 흑갈색의…….” 
“원숭이의자버섯? 예전에는 부싯깃으로 써왔다는?”
“박사가 쓴 것을 보니까 뭐랄까, 중간장사치가 있다더군. 챠가를 채집하고 말려서 돈 받고 파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비싼 게 문제야. 1킬로그램에 15루블이라니까. 제대로 치료하려면 한 달에 6킬로그램 90루블이나 드는 거야."
“버섯따기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오? 주머니와 도끼를 들고 숲 속을 헤매야 해. 겨울이면 스키를 타고 말이지.”




<p.p.159~164 - 『암병동』에서 부분 발췌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홍가영 옮김, 흥신문화사> 국내에 괜찮은 번역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초판발행일이 1993년인 흥신문화사 완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2015년에 나온 두 권으로 된 민음사 책인데, 여기에는 흥신문화사 번역본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1918-2008)이 쓴『암병동Раковый корпус』에 차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배경은 1955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병원인데, 실제로 그가 암에 걸려서 중앙아시아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개인적인 편지에 스탈린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강제노동 8년형과 영구추방 3년형’을 선고 받고 수용소와 병원에서 살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 피워낸 작품들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수용소 군도Архипела́г ГУЛА́Г』,『암병동Раковый корпус』등이다.








처음 2년 간은 국내에서 파는 최고급 제품을 사 드셨는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다행히 아빠의 건강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고가의 제품을 사 드시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고, 좀 더 저렴한 가격에도 괜찮은 제품이 있을까 싶어서 계속해서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블라디보스톡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내 사진 여행은 어느새 ‘챠가 어드벤처’가 되어 있었다. 



카메라를 메고 시내 곳곳에 있는 압쩨까Аптека(약국)를 찾아 다녔다. 오페라를 보러 가서도 그 옆에 있는 약국을 들러 ‘챠가 빠라쇽чага порошок(차가분말)’이 있는지 물었고, 저 멀리 중국시장에 사진을 찍으러 가서도 눈길을 걸어 주변의 약국들을 찾아 다녔다. 약국마다 구비하고 있는 개수도 다르고, 가격도 조금씩 달랐는데, 어떤 약국에서 한 개, 어떤 약국에서 두 개, 이런 식으로 사서 모으다 보니 내 배낭은 어느새 차가로 가득 차 있었다. 압쩨까에 파는 차가는 원물(덩어리)을 잘게 부숴 놓은 나무 가루 모양으로 커피 원두를 드립용으로 분쇄한 정도의 굵기였다. 차가는 상황 버섯처럼 목질로 되어 있어 어떤 박스에는 좀 더 굵은 모양의 나무 조각들이 들어 있을 때도 있었다. 용량은 한 박스에 50그람, 가격은 3천원 이내로 저렴한 편이었는데, 문제는 60도 이하의 물에 무려 3일을 꼬박 우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원래 드시던 것은 엑기스를 동결건조시킨 제품으로 암환자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인 크로모겐 컴플렉스Chromogen complex(크로모겐 복합체-크로모겐 외에 베타글루칸, 폴리페놀, 스테로이드 물질, 활성 산소를 제거해 항산화 기능을 하는 SOD 성분, 각종 미네랄 등을 통칭)의 함량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음용도 간편했는데 이 차가 분말은 최첨단 과정을 거친 제품이 아니다보니 아날로그적인 불편함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러시아까지 왔고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이어서 많은 양을 샀다. 몇 번은 우려서 드렸고, 또 직접 우려서 드셨지만, 번거로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원래 드시던 것과 흡사한 제품을 찾아냈다. 한국에서도 그 제품이 팔리고 있었는데 포장지만 바뀐 상태로 가격은 러시아 현지가의 몇 배였다. 그때 당장은 갈 만한 여유가 없어서 모스크바에 사는 동창생에게 부탁해 귀국편에 전달을 받았다. 그 회사의 본사가 이르쿠츠크였는데, 그래서 이번에 들러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내부 공사 중이어서 방문은 못했지만.  








그랬다. 이번 여행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빠를 위해 그리고 또 나의 오랜 친구 E의 어머니를 위해 차가버섯을 공수해 와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마침 드시던 것도 다 떨어져 갈 무렵인데다, 작업도 하고 싶었고, 또 그럴 만한 여유도 생기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2kg이나 되는 것을 한 달 넘게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 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서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예약한 호스텔에 미리 문의를 넣었는데, “서로 다른 직원이 돌아가며 상주하기 때문에 분실 위험이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래서 과감히 편해 보겠다는 생각을 접고 모스크바에서 주문을 하게 된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차가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트램 안에서 담은 사진이다.




“차가버섯 공수 완료!”

“고생한다, 고마워!”




한 때는 사진만을 위해 여행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진을 위해 여행을 하지만 꼭 사진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나는 니체의 이 말을 좋아한다. 




예술이 실천되는 것은 작품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이다. 작품은 예술적 삶의 과정에서 하나둘 남게 되는 부수적 결과여야 한다. - 니체

- 허윤희의 『나뭇잎 일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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