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Mayfeng Nov 17. 2019

매일 매일 고마운 사람





매일 매일 고마운 사람




다음 날 아침, Y는 나갈 채비를 하고 내게 물었다.



“우유 먹어?”


“응”


“그러면 바나나 우유는 먹어?”


“응, 먹어. 왜?”



잠시 사라진 그가 다시 나타나서 내민 건 테이크아웃한 커피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카푸치노처럼 생겼는데 맛을 보니 바나나 라떼다. 또 한번 가슴이 뭉클했다. 그 컵에는 카페 직원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내 이름이 아닌, '카뮈'였다. 알베르 카뮈를 좋아한다고 해서 Y가 그렇게 불러준 것 같았다. 그 시간, 앞 건물의 지붕 위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눈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옥상에 가자.”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구경시켜 줄게. 얇은 패딩 하나만 가볍게 입어.”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 바로 옆에 사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게 옥상으로 가는 사다리였다. Y는 먼저 사다리 위로 올라가 닫혀 있는 천장문을 연 후 천천히 올라갔다. 이어서 나도 올라갔다. 오래된 건물의 지붕 안은 또 처음이었다. 곳곳의 뚫린 창으로 비둘기들이 쉽게 드나들었다. 나무들이 비스듬히 누워 옥상 지붕을 받치고 있고, 바닥에는 둥근 자갈들이 깔려 있었다. 배관과 마감되지 않은 구조들, 왠지 캘리코 탄광촌에서 본 서부 시대의 집들이 떠올랐다. 곳곳에 그래피티도 그려져 있었다. 지붕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나무 계단은 다섯 개 정도 되었는데, 몇 걸음 걸어 올라가니 아찔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다 애써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눈으로 덮인 경사면을 걷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냥 그 계단에 서서 고개를 내밀고 앞과 좌우의 풍경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회색이던 하늘이 그 사이 파랗게 개어 있었다. 










저녁에는 예약해 둔 호스텔로 옮길 예정이었다. 그의 집에서 마신 이반차이Ivan Tea가 너무 맛있어서 조금 사고 싶다고 말했더니, 근처에 즐겨 가는 유기농 샵이 있다고 했다. 차를 사러 가는 길, 우리는 어쩌다 트라우마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샵에 거의 도착해서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얼른 마무리를 짓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는 내 이야기를 중간에 끊을 수 없다며 샵 앞에 멈추더니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음. 몇 년 전 이야기야. 남동생과 함께 살던 시절이 있었어. 내 동생도 너랑 같은 90년생이야. 그 때 나는 수면 중이었고, 남동생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어. 어디선가 잠을 깨울 만한 ‘쿵’하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비명 소리가 났어. 눈을 떠보니 남동생이 피를 흘리며 서 있었어. 나는 곧바로 119를 불렀어. 기다리던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동생은 샤워를 하다가 떨어진 세면대에 30센티미터 가량 허벅지를 베었고, 세면기의 도기 조각이 온몸에 박혀서 대수술을 해야했어. 



처음 그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세면대에 받침대가 없어서 늘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주인집에 받침대를 달아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 그런데 주인집에서는 ‘그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우리 빌라에는 다 받침대가 없다.’며 해 주지 않았어. 그 이후에 세면기 수전이 고장나서 주인집 사위가 직접 세면기를 떼었다가 달았는데, 불안은 더 커지기만 했어. 그리고 결국 이런 사고가 일어났어. 주인은 할머니였고, 관리는 사위가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사고 후에는 받침대가 달렸어.  



주인집 할머니는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라며 한 달 월세를 빼주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게 한 달 월세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어. 동생은 그 때 학생이었는데 사고로 인해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어. 병원에 2주 있는 동안 그들은 병문안은 커녕, 괜찮냐는 전화 한 통 없었어. 나는 매일  집과 병원을 오가며 동생을 수발했어. 병원 화장실에서 동생의 머리를 감기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더라. 퇴원을 하고도 동생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어.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목발을 짚어야 해서 많이 안쓰러웠어. 







나는 욕실에 들어갈 때마다 괴로웠어. 아니,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계속 그 순간이 생각났어. 물론 그 집에 계속 살 수도 없었지만, 적반하장으로 주인집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집을 비우라고 했어. 나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세면대가 아예 없는 집으로 이사를 갔어. 내용증명을 보내도 일부러 받지도 않고, 결국 법원을 몇 번씩이나 오가며 가압류라는 것을 걸어 두고 연락을 기다렸어.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나는 지쳤고, 그 일은 생각 조차도 하기 싫었어. 손해배상 소송을 해야 피해 금액을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 시간을 쏟다가는 내 인생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지. 뉴스나 미디어에서 이런 안전 사고 소식이 들릴 때마다 너무 끔찍해. 사고를 당한 사람들 마음이 너무 헤아려지거든. 그리고 앰뷸런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 해.  



동생에게는 큰 흉터가 남았어.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 가끔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수술 부위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해. 그날, 응급실로 향하던 119 안에서 들었는데, 그러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대. 그러니,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려고. 물론 여전히 찝찝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말이야. 



그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함께 마음 아파했다. 그 역시도 자신의 형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형수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형은 그 트라우마로 동양의 교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형의 마음도, 그걸 지켜본 동생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갔다. 우리는 얘기를 마저 끝낸 후, 몇 개 남지 않은 이반차이와 유기농 간식을 사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인도 음식점에 들러 콩 샐러드에 콩으로 만든 크로켓과 두부, 그레치카(메밀)를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먹었다. 









그는 다시 도서관에 일을 하러 갔고, 나는 짐을 싼 후 그의 글루카폰을 갖고 즉흥 연주를 하며 놀았다. 글루카폰은 영어로는 탱크드럼이라 불리는 악기인데, 둥글고 납작하고 오묘한 빛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만드는가 싶어 구글링을 해보니 놀랍게도 빈 가스통을 잘라서 만드는 악기였다. 거친 쇠에서 저리도 아름다운 악기가 탄생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탱크드럼을 두드리면 은은한 소리가 났는데, 그 울림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작곡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소파에 앉아 양 손에 둥근 고무볼이 달린 채를 들고서 나름의 곡을 만들었는데, 악보 표시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시계가 떠올랐고, 1시 방향을 두드리면 나는 소리를 1, 10시 방향은 10 이런 식으로 적어서 짧은 곡을 하나 완성시켰다. 



도서관에서 돌아온 그는 내게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카놀리였다. 도서관 옆에 있는 카페에도 카놀리를 파는데 오늘은 그곳이 일찍 문을 닫아서 택시를 타고 저 위에 있는 가게까지 가서 사 왔다는 것이다. 택시 운전수도 그가 카놀리를 사러 간다는 걸 알고 자신도 카놀리를 사겠다고 하여 같이 가서 카놀리를 샀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박스 안에는 커다란 카놀리가 네 개 들어 있었는데, 그가 먹을 것 하나만 빼고는 내일 호스텔에서 아침으로 커피와 먹으라며 챙겨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 가방 속에 나 몰래 몇 개의 이반차이까지 더 넣어 둔 게 아닌가! 자신은 가까이 살아서 쉽게 사 먹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니 넣어 둔거라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고마움이 끝이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