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에서 온 야생꿀
“러시아엔 왜 온거야?”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처음엔 북유럽 여행 중에 들렀어. 4년 전이야. 그 때 처음으로 무비자 협정이 시작되었을 때였는데, 러시아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일정에 넣었지. 오니까 너무 좋더라구. 비는 계속 내렸지만, 뭔가 파리 같기도 하고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낭만적이었어. 그런데 딱 사흘 밖에 못 있었어. 꼭 다시 와야지 싶더라. 재작년에는 항공권을 찾다가 정말 싸게 나온 블라디보스톡행 비행기표를 발견했어. 왕복 9만 얼마였나? 아무튼 그래서 또 러시아 여행을 하게 됐지. 공항에서 버스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블라디보스톡 역 앞이었는데 거기서 횡단열차를 탈 수 있다고 하더라고. 상상만 하던 것이 조금 구체적으로 보였지. 그래서 다음 번에 나도 타볼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어. 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마음 속에 담아뒀다가 이 때다 싶을 때가 오면 실행에 옮기는 거지. 그러다가 이번에 또 몸이 근질근질하길래 어디로 갈까 하다가 횡단 열차 생각도 나고, 이왕이면 겨울에 타야 맛이 날 것 같고…… 하하. 아냐 사실 나 꿀 사러 왔어.”
“꿀?”
“응. 꿀.”
2년 전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친구가 프리모리예 지방(블라디보스톡이 있는 주)의 꿀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러시아어로 꿀을 묘뜨Мед라고 하는데, 그 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액상으로 된 꿀과는 달리, 되직하고 불투명한 꿀이었다. 꿀은 진심으로 꿀맛이었다. 직접 구운 호밀 사워도우 빵에 그 꿀을 발라서 먹으면 행복한 맛이 났다. 그린필드(러시아 홍차 브랜드)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미스터리’라는 홍차가 있는데, 거기에 약간의 우유와 꿀을 넣어 마시면 어딘가 이국적인 산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꿀이 똑 떨어져 버렸다. 그때부터 나의 '묘뜨앓이'가 시작되었다.
“꿀? 이거?”
“응. 나 러시아 꿀 좋아해. 지금 내 가방에도 얼마 전에 이르쿠츠크 시장에서 산 리뽀비(보리수) 꿀 있어. 먹어볼래?”
러시아인들의 부엌 테이블 위에는 항상 꿀이 올려져 있었다. 우린 서로의 꿀을 비교해 가며 맛을 봤다. 이번에 시장에서 산 리뽀비 꿀은 색깔이 짙고 가격이 좀 비싼 편이었는데 치즈 같은 약간의 꼬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여행 중에 감기 기운이 느껴질 때 꿀물과 비타민 C를 꼭 챙겨 먹는다.
“아는 사람 중에 벨라루스 산골에서 꿀 농사 짓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네 꿀이 기가 막혀.”
“정말?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네. 아, 내가 듣기로 러시아는 설탕값이 더 비싸서 모든 꿀이 천연이라던데 정말이야?”
“하하하.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벌들에게 설탕을 먹여.”
“진짜? 러시아도 그렇다고? 정말 몰랐어.”
“대량 생산자들이 그렇게 한대. 꿀벌들이 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없는 거지. 그래서 흰 설탕을 잔뜩 들이 붓고 통을 닫아 버린대. 그러면 벌이 그 안에 갇히는 거지.”
“뭔가 슬프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친구야?”
“예전에 벨라루스의 한 공동체에 봉사 활동을 간 적이 있었어. 민스크(벨라루스 수도)에서 7시간이나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얼마나 깊고 깊은 숲 속인지, 늑대나 곰, 여우 같은 동물 외에는 이웃이 거의 없었어. 로만은 거기서 수행 공동체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사는 청년이었지. 서른을 갓 넘겼는데, 맑고 푸른 눈에 놀랍도록 차분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영어는 한 마디도 못 했어. 긴 흑발 머리에 수염도 길렀는데, 뭐라 할까, 70-80년대 소비에트 록 밴드 드러머 같았어. 완전 야생 사나이였지. 거기에는 전통 슬라브 방식으로 만든 목조 주택과 반야(러시아식 사우나)가 있었어. 그 두 가지는 숲속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 친구네 가족은 8년 전부터 자연 생활을 해오고 있었어. 처음에는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감자도 캐고, 약초도 캐고. 지금은 가축들도 많이 늘어나서 양 50마리에 말 3마리, 거위랑 닭도 거의 수십 마리에 허스키들도 10마리 정도 있는데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들은 거기 산 후로 병원을 간 적이 없대. 개인 서류들도 다 잃어 버렸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도시의 바쁜 샐러리맨들보다 더 행복해 보였어. 어쨌든 그 친구가 정말 꿀 밖에 몰랐어. 앉기만 하면 꿀 얘기였거든.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수 백 개의 꿀 항아리를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네가 꿀을 좋아한다니 그 꿀을 꼭 맛보여 주고 싶네. 오랜만에 연락을 해봐야겠어.”
그런 대화를 나눈 며칠 후, 아침잠에서 깨었는데 메시지가 들어왔다.
“쥴리, 좋은 아침!”
“안녕!”
“하루 잘 시작했어?”
“아직 시작 안 했어. 하하하!”
“아직 침대야?”
“응. 넌?”
“난 이미 시작했지. 너한테 꿀 주고 싶은데 언제가 좋을까?”
“혹시 허니맨 온거야? 나 여기서 12시에 체크아웃해.”
“30분 후에 거기 호스텔 앞으로 갈게, 괜찮아? 그런 다음 나는 요가 가려고.”
“30분? 응. 그래. 꿀값은 얼마야?”
“뭐라고?”
“꿀 말이야.”
“공짜야.”
“뭐?”
“난 그냥 너한테 이 맛있는 꿀을 맛보여 주고 싶은 것 뿐이야.”
Y는 정확히 30분 후에 호스텔 앞으로 왔다. 추운 곳에 서 있을 수 없어서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호스텔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그는 가방에서 커다란 유리병에 든 꿀을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세상에!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허니맨이 12시간을 운전해서 벨라루스 산골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왔다는 것이고, 꿀을 배달한 후 다시 운전을 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권이 만료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국경을 넘었다고.
어떻게 이런 동화 같은 얘기가 있을 수 있을까? Y는 그 아름다운─늑대와 꿀벌들과 허스키들로 가득한─장소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종종 꿀을 주문해서 먹는다고 한다. 그런 귀한 꿀을 내가 떠나기 전에 맛보여 주려고 가져다 준 Y나, 질 좋은 꿀을 생산하고 그렇게 먼 곳에서 꿀을 배달해 주고 간 로만이나 모두 천사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벌들은 최고의 꽃을 찾기 위해 근처의 따뜻하고 푸른 초원으로 날아갑니다. 꿀맛을 잊어 버린 사람들과 진짜 꿀의 순수한 맛을 나누는 것이 저의 꿈이에요. - 로만’
나는 그 소중한 꿀을 뾱뾱이와 옷으로 잘 감싼 후 9,288킬로미터의 시베리아 횡단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까지 잘 모시고 왔다. 내가 먹을 만큼만 조금 덜어내고 커다란 꿀병은 부모님께 드렸는데, 어느 날 엄마가 목이 아파 그 꿀을 드시고는 마술처럼 목이 싹 나았다고 한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