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은 배들
일본의 야마토급, 미국의 아이오와급 전함과 더불어 세계 최강의 전함으로 알려져있는 독일의 전함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머물다 간 전함이지만 존재하던 당시 그 존재만으로도 영국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취역부터 침몰때까지 수 많은 영국 전함을 달고 다녔던 ‘트러블메이커’였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네임쉽이지만 자매함이었던 틸피츠(Tirpitz)보다 1년 늦은 1940년 8월에 취역했는데 애초 영국과 합의되었던 1934년 계획 때의 39,000톤의 제한을 넘어 50,995톤의 배수량으로 완성되어 당시 세상에 나와 있던 어떤 나라의 전함들보다도 그 규모에서 세계 최대에 이르러 있었다. 독일은 이전까지 이른바 포켓전함이라는 형식의 대구경의 포를 장비하고 경장갑으로 무게를 맞춘 고속전함을 내놓곤 했는데 이 배들보다도 거의 20,000톤이 넘는 규모의 전함을 슬그머니 내놓은 것이다. 이는 대구경의 포(380mm 포 8문)뿐만 아니라 선체 대부분을 두껍고 견고한 장갑으로 둘러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장 251미터에 선폭이 36미터의 덩치였지만 최대속도가 31노트에 이르는 기동성도 갖추고 있었으니 이 급의 배가 처음 나왔던 때에 그 첩보를 입수한 영국이 느꼈을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의 전함이 장거리에서 포를 쏴서 데미지를 입히고 빠른 속도로 빠지는 아웃복서였다면 비스마르크는 적탄에 두들겨맞아도 슬그머니 다가와 무거운 주먹을 날리는 헤비급 인파이터의 모습이었다.
철혈제상 비스마르크의 치세는 꽤 길었지만 그 이름을 물려받은 전함 비스마르크의 치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앞에 얘기했었던 영국 전함들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후드와의 1941년 5월 24일의 펀치공방이 그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게 되는 유일한 해전이었던 것. 헤비급 파이터답게 일격에 후드를 두 동강내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옆구리에 새 방의 하드 펀치를 먹여서 아예 작전에서 이탈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기름탱크에 얻어맞은 몇 방의 타격이 비스마르크에도 치명상이 되고 말았다. 기름의 유출로 인해 궤적이 들통나고 유출된 기름으로 인해 재보급없이는 아예 복귀가 어렵게 된 상황, 거기에 자존심이 상한 영국 해군은 이 참에 골칫거리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였고 기어이 지중해 함대를 모조리 긁어모아 비스마르크로 향한다.
당시까지 운용 중이었으나 이미 구식 비행기로 소문났던 영국의 소드피쉬 뇌격기에게 타기를 얻어맞고 조함자체가 불가능해진 비스마르크는 두 척의 항공모함(아크로열, 빅토리어스)과 킹조지 5세, 리나운, 로드니 세 척의 전함, 그리고 수많은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거대한 먹잇감으로 변하고 말았고 5월 27일, 88분간에 걸쳐 400여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공격을 받고 전투불능에 빠진다. 애초 맷집을 키우기 위해 선체 사방을 중장갑으로 둘렀던 전함이었던만큼 이런 맹공에도 침몰하지 않고 버티던 거함 비스마르크.
결국 자침을 선택하고 스스로 배 바닥에 폭탄을 설치하고 침몰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을 포함한 승무원 2,206명 중 115명 구조. 구조된 선원 중에 장교는 없었고 이후 틸피츠를 제외하고는 독일의 중장갑 전함은 전무한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후 히틀러 역시 한 번 침몰하면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오게 되는 거대함의 건조보다 오히려 U-Boat와 같은 중소형 잠수함 전력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3년 독일 해군 장관이던 에리히 레더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유보트 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를 앉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