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은 배들
전쟁이라는 상황은 결코 미화될 수 없고 나의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편의 누군가가 죽어나가야하는 비극의 공간이다. 결국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희생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인 것.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 지나간 뒷일이라서 웃을 수 있는 - 코메디 영화에나 기록될만한 기록들이 남아있었고 오늘 소개할 배가 바로 영화로 만들어도 실화라고는 믿을 사람이 없을 어처구니 없는 역사의 주인공인 USS William D. Porter(DD-579)호의 이야기이다.USS William D. Porter
1942년 9월 27일에 태어나서 1945년 6월 10일 침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전장에 나와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 사라져간 수많은 DD(구축함)중 하나지만 3년 가까운 생애동안 이 배가 남긴 파란만장(?)은 그야말로 압권 중에 압권이다. 9월말 진수하여 선원들의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11월, William D. Porter호는 처음으로 큰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비밀리에 이동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태운 USS IOWA(BB-61)의 호위함으로 함께하게 된 것. 함대가 이동하면서 대통령의 보호를 위해서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의사소통은 발광신호로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에 대해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 이후 큰 사고를 치게 된다.
11월 12일, 출발후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대장은 그사이 계획했던 훈련을 대통령 앞에서 보여주기로 했는데 그 직전 첫 번째 사고가 벌어진다. William D. Porter호의 후부갑판에 놓여있던 폭뢰가 실수로 인해 떨어지면서 함대 한 복판에서 폭뢰가 폭발하는 사고가 터진 것. 적 잠수함의 공격인 것으로 착각한 모든 함대가 회피기동을 시작했고 구축함들은 바닷 속에 숨어있을(?)적의 정체를 찾기 위해 모조리 잠수함 추적에 나서기 시작했다, 식은 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던 한 척만 빼고.
상황이 이쯤되면 '우리의 실수였다.'고 밝혔어야 했겠지만 그들은 입을 다물기로 작정했고 결국 함대는 한동안 정체도 모호한 적함을 찾기 위해 이튿날까지 생고생을 해야했다. 결국 어떤 적함(?)도 찾지 못하고 유실되어 흘러온 기뢰의 폭발로 마무리지으며 헛고생을 마무리 했지만...
이 사고뭉치의 대형사고는 바로 그 다음날 벌어지게 된다.
이튿날, 대잠수함 공격에 대비한 어뢰회피 기동훈련. 대항군으로 기함인 IOWA호를 향해 어뢰발사훈련을 하게된 William D. Porter호는 빈 어뢰통을 가동하여 '어뢰가 발사되었다.'는 신호로 훈련을 가늠하기로 했지만 이 정신나간 배의 어뢰장은 실제 어뢰가 장전되어 있던 발사관을 당기고 말았다. 대통령과 해군참모총장이 머물고 있는 기함을 향해 발사된 어뢰.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William D. Porter호의 발광신호는 엉뚱한 신호만을 날리고 있었고 - 첫 번째 신호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두 번째 발송한 메세지는 'FULL ASTERN(전속후진)'이었다고 - 결국 다급한 상황에서 사용이 금지되어있던 무선을 열고 자신들이 아이오와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음을 이실직고하게 된다.
졸지에 IOWA호는 전날의 난리에 이어 이번에는 실제 어뢰를 피하는 필사적인 회피기동에 들어갔고 결국 3,000 yard (2,743m)나 미친듯이 후진한 후에야 어뢰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승선 중이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발사된 어뢰는 생전 처음 본다며 구경에 나섰다고 하는데 상황 종료후 이 상황을 마주한 IOWA의 함장과 해군의 최고 직위에 있던 어네스트 킹 제독의 깊은 빡침은 안봐도 뻔한 일.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진 미해군의 대망신 사태 앞에서 IOWA는 주포인 16인치(406mm)포 9문을 모조리 William D. Porter로 향하게 하고 앞에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겁에 질려 전날의 폭뢰 오발 사건까지 모조리 이실직고한 William D. Porter호의 함장. 당장 함대에서 빠져서 모항인 버뮤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William D. Porter호는 혼자서 처량하게 버뮤다로 향하게 된다. 11월 23일, 버뮤다에 도착한 William D. Porter의 승조원은 완전 무장하고 선상에 올라온 해병대원들에게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로 전원 구금되는데 이는 미국 해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해군 군사재판에서 암살기도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지만 어뢰의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던 포술장에 대해서는 14년의 노역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단순 실수인데 너무나 큰 처벌을 받는다며 용서를 요청한 통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탁으로 모두 풀려나서 원대로 복귀하게 된다.
William D. Porter는 12월 21일, 다분히 문책성인 어네스트 킹 제독의 엄명에 따라 대서양에서 모든 해군들이 기피하던 알라스카 인근의 알류산 열도로 배치된다. 당연히 엄청난 추위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자중(?)하며 지냈어야 하겠지만 술에 만취한 수병이 5인치 주포를 발사하여 기지 사령관 사택의 마당을 날려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계속되는 사건사고로 인해 본의 아니게 모든 미해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William D. Porter.
그나마 계속되는 병크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만들지는 않았으니 이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해군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태평양 인근에 배치하기 시작하며 William D. Porter 역시 한가한 알류산 열도를 떠나 태평양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간 쌓아둔 사고뭉치의 이미지를 벗으려는 듯 필리핀 침공 작전시에는 일본 항공기에 대한 상당한 전과를 올리며 이미지 쇄신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항공기의 습격에 대비한 대공사격 훈련 도중 동료 함정인 USS LUCE의 좌현 측을 40mm대공포로 벌집을 만드는 사고를 치며 사고뭉치의 이미지를 지우는데 실패하고 만다. - 봉변의 주인공이었던 USS LUCE(DD-522)는 이때 받은 상처를 수리하고 출항했다가 1945년 5월, 카미카제 공격기의 공격을 받고 오끼나와 연안에서 침몰했다.
미해군 역사상 최고의 사고뭉치로 기록된 William D. Porter에게도 최후의 순간은 다가오게 된다.
오끼나와 공방전을 위해 이동한 William D. Porter는 오끼나와에 대한 포격임무와 해병의 상륙함 호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10일, 마지막 남은 항공 전력을 카미카제로 밀어넣은 일본의 자살공격대를 맞이하게 되는데 여러 기의 적기를 격추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자신들의 대공포망을 뚫고 자살 공격에 나선 99식 함폭이 돌입해오는 상황을 맞이한다. 다행히 회피기동에 성공하여 직격은 피했으나 다음 순간, 물 속으로 쳐박혔던 99식 함폭이 하필 현측으로 흘러들어와 폭발하며 우현측과 외판 안쪽의 동력선(Steam line)에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큰 타격을 입고 말았고 피격된지 3시간만에 침몰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해병 양륙함이 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며 단 한 사람의 희생자 없이 기적적으로 모든 승조원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고 악동은 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재빠른 판단으로 William D. Porter의 승조원을 모두 무사히 구조하는데 성공했던 양륙함 LCS(L)(3)-122의 지휘관이었던 리차드 맥쿨 중위는 이 공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미의회 명예훈장(Medal of Honor)를 수상하게 된다.
USS William D. Porter는 이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구축함이었다. 수많은 사고를 치면서도 인명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고 마지막 가는 길에도 자신의 승조원 하나 잃지 않았으니 불운하기 보다는 행운을 가지고 있던 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군 안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되 이 배의 여러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간 비밀에 붙혀질 정도였으니 전쟁말기의 심각함 속에서 이런 망신스러운 일로 이미지를 흐리고 싶지 않았던 해군의 노심초사가 눈에 그려진다.
하여간, 마지막의 고군분투로 그간 쌓아두었던 오명은 덜 수 있었고 미해군도 작전 중에 명예롭게 침몰한 이 배에게 전쟁 중 마지막인 네 번째의 종군기념성장(Battle Star)를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