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피카츄에도 악당이 있어?”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서 옆 테이블 손님들의 대화를 무심코 듣게 되었다. 유치원생쯤 되는 아들을 앞에 앉히고 밥을 먹던 젊은 아버지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피카츄에도 악당이 있어? 무슨 대화가 이어질까 궁금해질 새도 없이, 살짝 덜 익은 계란 노른자를 섞은 콩나물국밥 한 숟가락을 퍼 먹었다. 고소함을 통해 찾아온 행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스파라긴산의 영험한 효능이 술도 안 마신 나에게 숙취해소를 선사하는 듯한 그런 맛이었다. 아들의 대답이 궁금할 새도 없이 그들의 대화에 대한 내 관심은 강물이 흘러가듯 저 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콩나물국밥은 그토록 맛있었다.
그리고 하루 반나절이 지나 저녁으로 먹던 닭도리탕의 감자 한 덩이를 숟가락으로 으깨다가, 나는 문득 그 아버지의 물음을 다시 떠올렸다. “정말? 피카츄에도 악당이 있어?” 뭔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당연하겠지만... 피카츄에도 악당은 있다.
일단 그 아이 아빠가 의미한 정확한 제목은 아마도 ‘포켓몬스터’ 일 것이다. ‘피카츄’는 그 만화의 제목이 아니라 주인공의 이름이다. 사실 나도 포켓몬스터를 본 적은 없지만 피카츄가 주인공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아들의 콘텐츠 소비에 얼마나 무관심했길래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피카츄에도 악당은 있다.
그 어떤 서사에서도 악당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 서사라는 것은 갈등을 데려와서 그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해소시킬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설령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병아리처럼 샛노란 색에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인 귀여운 아기동물이라고 할 지라도 시련을 주고받는 숙적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귀엽게 생긴 짐승이 어째서 수백만 볼트의 치명적 전기를 방출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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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그 이야기 속에 삶을 투영시키며 나이를 먹어 간다. 문제는 ‘이야기’를 통해 배운 ‘갈등’이라는 개념이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주입되었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우리는 악당에 대한 피로감에 절어 있다. 악당은 나를 괴롭히는 상사의 모습을 할 수도 있고, 남편이랑 애 자랑을 드럽게 많이 하는 얄미운 친구의 모습을 할 수도 있고, 지속적인 정제 복합 탄수화물 섭취가 초래한 똥뱃살의 모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악당(villan)이라는 개념 자체를 곰곰이 따져 보면 외부에서 나에게 침투하는 자극이 아니다. 외려 나 스스로가 외부 자극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방어심리의 결과물이다. 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원숭이 시절부터 우리 뇌에 프로그램된 본능이기도 하다. 위험에 많이 노출된 환경에서는 적개심을 가져야 사전에 능동적 방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화된 사회다.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원시 시대부터 익숙해진 버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악당을 정의하려 애쓰고 있다. 어쩌면 '악당'은 생존본능의 스토리텔링적 측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악당을 대하는 우리들의 요령은 심플할 수도 있다. 악당은 악당 노릇을 하게 내버려 둬도 된다. 내가 상처 받지 않기로 결심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신경이 쓰이면 악당이지만 완전히 무시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편, 좋은 친구는 더 많이 사귀면 도움이 된다. 피카츄에게도 악당이 있었지만, 친구들도 많았다.
조금만 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악당을 친구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