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층입니다”
광교에 살다가 판교로 이사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내가 누른 층에 도착하며 엘리베이터에 나오는 층별 안내 목소리를 듣고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광교에 살던 아파트의 안내 목소리와 동일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굉장히 많은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항상 들어왔고 정말 많이 들어왔지만, 문득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 묘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엘리베이터의 층별 안내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한 정보기 때문에 굳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녹음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회사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로 녹음을 한 후, 모든 제품에 동일한 목소리를 쓰지 않았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아무나 알아채기 어렵지만 꽤 자부심이 있을 듯도 하다.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웅장한 빌딩의 고급스러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47층입니다.”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속으로 거만한 표정을 짓지 않을까?
녹음을 하는 과정도 꽤나 궁금하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00층입니다”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같은 단순한 멘트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다. 쉽게 끝내 주는 것은 없다. 아마 똑같은 멘트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녹음해야 했을 것이다. 최고의 녹음이 나왔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본인의 목소리니 본인이 최고의 테이크를 직접 정하고 음 이 정도면 되었어 하는 식이었을까? 아니면 딱히 전문성은 없지만 마침 프로젝트를 담당한 이름 모를 직장인에게 계속해서 갑질 당하며 수십수백 번을 녹음해야 했을까?
거의 십 년 전의 일이다. 지하철 정차역을 안내하는 영어방송의 목소리 주인공이 텔레비전 방송에 나온 것을 보았다. 몇몇 개그맨들이 출연해서 영어를 배우는 프로였나 그랬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어 발음을 위해 섭외되어 나온 원어민 영어교사였다. 영어교사 일을 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지하철 안내방송 목소리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유창한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출연자들은 그 사실을 들으며 크게 놀랐다. 정차 방송을 했던 대사 몇 개를 말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 프로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개그맨들이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영어교사가 헐리우드 배우 뺨치는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이쯤 되면 중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의 목소리 주인공들도 궁금해진다. “찅빵뙇쭣씡, 칭량리 칭량리(이번 정차하실 역은 청량리 역입니다 - 사실 정확한 발음은 모른다)”이런 대사를 녹음하며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일본어 방송의 경우 원래 중국어보다 먼저 나왔었는데, 중국인 관광객 수가 훨씬 많아지면서 순서가 바뀌었다. 요즘은 중국어 방송이 먼저 나온다. 일본어 방송의 목소리 주인공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낙담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할까?
지금도 공공장소에 흘러나오는 갖가지 안내멘트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모르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방송이 나올 때마다 “훗,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